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설 Aug 09. 2019

비혼주의자와는 연애 안 합니다.

비혼주의자 은수 씨의 고충

은수 씨는 비혼주의자다. 세상에 영원불멸한 건 없다고 믿는 그녀에게 결혼은 그야말로 허상이다. 신혼이라는 한 순간의 달콤함을 위해 평생의 자유를 희생한다는 것은 그녀에겐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돈 잘 벌고, 애 잘 키우고, 집안 일 잘하고, 부모님도 잘 모시는 슈퍼우먼 아내는 있을지 몰라도 슈퍼맨 남편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그녀의 비혼 신념은 굉장히 견고하다. 서로의 추악한 본성을 들켜 파멸하고 마는 사랑과 전쟁의 엔딩이 그녀가 정의하는 결혼의 참모습이다.


누군가는 은수 씨에게 그럼 연애도 안 할 거냐고 묻는다. 그녀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줄곧 '1차원적인 질문을 하는 당신과는 대화할 가치가 없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겉치레를 챙겨야 하기 때문에 질문자의 수준에 맞춰 "연애 따로, 결혼 따로 아닌가요?"라고 웃으며 대답한다. 사실 은수 씨는 연애에서만큼은 운명과 인연을 믿는다. 단지 평생을 함께 할 인연의 존재를 불신할 뿐, 만날 사람은 만난다는 것에는 비교적 동의한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의외로 낭만적 기질이 있어 연애에 대한 로망도 갖고 있다. 참고로 은수 씨는 연애 경험이 많지도 적지도 않다.



장마가 막 시작될 쯤이었다. 은수 씨는 한 남자를 만났다. 딱히 소개팅은 아니었지만, 이런 만남을 뭐라고 해야 될지 몰라 친구들에게는 소개팅이라고 둘러대었다. 얼굴도 잘 모르는 남자와 단 둘이 낮에 만나는 것이 오랜만이라 그녀는 조금 긴장이 되었다.


그는 사진보다 실물이 썩 괜찮았다. 웃을 때 보조개가 매력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은수 씨는  크고 차 있는 남자가 이상형이었으므로 이성적인 끌림을 느끼는 않았다. 그들은 점심을 먹으며 여느 소개팅처럼 하는 일은 뭔지, 어떤 취미가 있는지, 최근의 연애는 언제였는지 등을 이야기했다. 딱히 기억할 만한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그나마 그의 회사 복지가 좋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대기업에 다니는 것 같다는 추측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는 정말 연애 상대를 찾으러 나온 건지 과거의 연애사나 이상형 같은 것들을 물어보고, 본인은 어떤지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녀는 지루함을 느꼈으나 꽤나 흥미로운 척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결혼이라는 피할 수 없는 주제가 나왔다.


"저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혼은 하고 싶어요. 둘이 같이 살면 재밌을 것 같아요. 은수 씨는 어때요?"

"저는 비혼주의자예요."

"비혼주의자요?!"


순간 잘못 들었다는 듯이 펄쩍 뛰며 재차 묻는 그의 태도에 그녀도 짐짓 놀랐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었지만 아예 겪어보지 못한 반응은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비혼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 있던 사람과 평생을 함께한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리고 결혼으로 인해 제 삶에 변화가 오는 것도 달갑지 않고, 역할이나 책임이 늘어나는 것도 싫어요. 무엇보다 아이 양육 때문에 경력이 단절되는  더 싫고요."

"그럼 결혼을 반대하시는 건가요?"


은수 씨는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돌아온 질문에서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결혼을 반대하는 거냐니, 최근 들어본 이야기  어처구니없는 것 BEST 3에 들법한 것이었다. 은수 씨는 결혼 여부는 개인의 선택이고, 나 스스로가 비혼을 선택했을 뿐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결혼은 여러 라이프스타일 중 가장 대중적인 형태이지 단순히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라고도 덧붙이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그는 존중한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지만 진심 같아 보이진 않았다. 뒤이어 오는 그의 말이 이를 증명했다.


"모든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결혼 생각이 없는 사람과 만나기는 힘들 것 같아요. 결혼을 생각할 여지조차도 없다는 게... 만일 제가 더 어렸다면 설득하려는 노력이라도 해볼 텐데 지금은 굳이 그러고 싶진 않네요. 시간 낭비인 것 같아서. 혹시 비혼처럼 또 다른 장애물이 있나요?"


은수 씨는 어리둥절했다. 퇴짜 맞은 건가라는 생각은 둘째 치고, 장애물이라는 그의 말이 귀에 꽂혔다. '비혼이 장애물이라고?' 얼떨떨함과 동시에 뭔지 모를 찝찝함이 올라왔다.



합의점 없는 대화를 마치고 집에 오며 은수 씨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비혼이 연애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그녀도 이해하고 있었다. 결혼을 통해 가정을 꾸리는 게 행복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겐 당연히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 중요할 테니. 그녀가 찝찝함을 느꼈던 포인트는 퇴짜를 맞은 것도, 1은 알고 2는 모르는 그의 태도도 아니었다. 바로 '장애물'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반향 때문이었다. '장애물'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스스로가 큰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결점이 너무 커 시작은커녕 생각해 볼 가치도 없이 구석으로 치워져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결점을 메우기 위해 굉장히 나이스 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애썼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내 인생을 스스로 지휘하기 위해 비혼을 선택했어요', '미래를 위해 서른 되는 해에 제 집을 마련할 거예요', '대학원에 가서 그림을 공부하고 싶어요' 등 그럴듯한 말로 은수 씨 본인을 포장하고 있었다. 비혼주의자는 어딘가 문제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도 모르게 설득하려 했다는 게 역겨웠다.


은수 씨는 최근에 본 드라마의 한 대사가 떠올랐다. 비혼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 주인공에게 여자 주인공은 "네가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건 해명할 필요도 없지만, 결혼을 안 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너한테 이렇게 많은 걸 해명하고 있잖아."라고 말한다. 은수 씨도 그랬다. 그는 결혼을 단순히 '둘이 같이 사는 게 재밌을 것 같아서 하고 싶다'고 했지만, 은수 씨는 '아이 양육, 경력 단절, 늘어나는 역할과 책임감을 감당하고 싶지 않다'며 최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댔다.


"좆같다."


은수 씨는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꺼내 마시며 읍조렸다. 그리고 더 이상 설득 아닌 해명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