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 씨는 원나잇을 옹호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서로의 육체적인 매력에 이끌려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고 이해는 하지만, 굳이 낯선 사람과 성병 걱정하며 관계를 맺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걱정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섹슈얼하게 느껴졌던 남자도 없었다. 그녀에게 섹스는 사랑의 방법 중 하나일 뿐,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은수 씨는 최근 다양한 사람을 만나오며, 섹스만을 위한 관계를 원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수 씨는영화감독이꿈이라던 남자와 술을 마셨었다. '예술'은 위선자들이 쓰는 말 같다며,'창작'이란 단어를 좋아한다는 사람이었다. 그와 은수 씨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그가 쓰고 있다던 시나리오 내용, 어디에 돈을 가장 많이 쓰는지, 감정 소모가 큰 일은 뭔지, 서로의 꿈은 뭔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본인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는 듯했지만, 그가 싫어한다던 '예술가'의 위선적인 면은 그에게도 있었다.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은 으레 이래야 한다는 식의 태도가 그랬다. 은수 씨는 낯선 남자와 생산적인 이야기를 나눈 것이 실로 오랜만이라 딱히 거슬리지는 않았다. 이미 우려먹을 때로 우려먹었을 법한 연애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한 잔 두 잔 대화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다 보니 새벽이 되었다. 자리를 옮기려는 중에 그가 물었다.
"은수 씨 저랑 잘 생각 있어요?"
"네?"
"혹시나 해서요. 만약 그런 거라면 모텔 가서 술 더 마셔도 되니까."
"... 아뇨, 잘 생각 없어요."
은수 씨는 아차 싶었다. 새벽까지 두 남녀가 술을 마시는 행위가 언제부터 암묵적으로 섹스를 해야 된다는 신호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랑 자고 싶어요?"
"자면 좋죠."
"왜요?"
"... 남자는 그래요."
은수 씨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가벼운 만남이었지만 섹스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본인을 여차하면하룻밤 잘 수 있는 원나잇상대로 보고 있었다는 게 허탈했다. 물론 은수 씨도 그에게 끌림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그에게 관심이 간다며 한 번 더 만나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했다. 말투와는 다른 귀여운 외모가 썩 마음에 들었다.그러나 섹스는 그다음 문제였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을 뿐, 그와의 잠자리가 어떨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던 은수 씨. 그 날 술자리는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은수 씨는 또다시 그를 만나지 않았다.
한 번은 누군가 은수 씨에게 원나잇 경험을 물었었다. '없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갑자기 '원나잇 예찬론자'가 되어 왜 사람들이 원나잇을 안 좋게 바라보는지 모르겠다며, 본인은 정말 떳떳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은수 씨가 본인의 생각에 동조하기를 바랐다.
"대체 왜 한국에서는 원나잇에 대한 시선이 안 좋은지 모르겠어. 너도 그래?"
"뭐 하룻밤 잘 수야 있겠지. 근데 난 굳이 그런 불장난은 하고 싶진 않은데"
그는 원나잇만큼 쿨한 관계가 없다며, 새벽 내내 원나잇과 섹스 파트너, fwb(friends with benefit)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내리기 시작했다. 섹스 파트너는 어디서 만나고, 원나잇은 보통 어디서 한다는 본인의 경험을 반영해서 말이다. 그는 스스로가 굉장히 자유로운 인생을 산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근데 너 유학 갔다 왔어?"
"아니?"
유학 다녀온 오픈 마인드의 소유자 컨셉을 잡았던 걸까. 그는 은수 씨의 가치관도 존중한다고 말은 했지만, 개인기 실력을 뽐내는 강아지처럼 본인의 섹스 예찬론을 인정해주기를 졸랐다. 순간 은수 씨는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그렇게 자랑스럽고 인정받고 싶으면, 부모님한테 말하지 왜 나한테 지랄'
언제부터 섹스를 위한 관계가 쿨한 관계가 되어버린 건지 은수 씨는 알 수 없었다. 섹스만을 위한 관계는 결국 모래성을 쌓는 것과 별 다를 게 없다고 느꼈다. 쾌락만을 좇다가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파도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그런 관계. 과연 건강한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은수 씨는 누군가에게 원나잇 상대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 한 번 잤던 여자로 기억되는 건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