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연초가 되면 자연스럽게 술 약속이 늘어난다. 은수 씨도 어김없이 그동안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나며 불타는 새해를 맞았다. 매년 나이를 먹지만, 매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시간은 갈수록 왜 이리 빠르게 지나가는지, 쫓다가 가랑이라도 찢어지면 어떡하냐며 답 없는 걱정을 했다. 그녀는 친구들과 건배를 외치고 새해에는 술을 줄이자는 지키지 못할, 어차피 지킬 생각도 없던 다짐을 했다.
한 잔씩 들이킬 때마다 술자리 토크의 주제는 휙휙 바뀌었다. 빠질 수 없는 안주인 추억팔이를 거쳐 지나간 연애를 리뷰하고 현재의 연애 상황을 보고했다. 한 친구는 전 애인이 생일선물로 사준 목걸이를 번개장터에 팔아 속 시원해했고, 한 친구는 편안한 연애를 하고 싶다는 애인의 말이 재수 없다며 욕했다. 모두가 적극적으로 토크에 임하던 탓에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은수 씨는 친구 A가 애매한 표정으로 말없이 술만 들이켜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평소에 잘 조잘거리던 A였기에 조용히 지켜보다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A는 대뜸 "나 헤어질까 봐"라고 말했다.
"... 갑자기? 만난 지 얼마 안 됐잖아."
"응, 근데 짜증 나서 못 만나겠어."
"왜 뭐 때문에?"
"아니 스킨십에 미친 사람 같아. 너네 스킨십에 돌아버린 사람 만나본 적 있어?"
A는 새로 만난 남자 친구가 스킨십에 미친 사람이라며 치를 떨었다. 은수 씨와친구들은어리둥절했다.'치를 떨 정도의 스킨십이 대체 뭐지?'하고 생각하려던 찰나, A는 숨도 안 쉬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직장 선배의 소개로 만난 A와 그의 남자 친구는 만난 지 6개월이 됐다. 준수한 외모와 훤칠한 키, 대기업 대리라는 조건 말고도 A는 남자 친구의 자상한 성격을 좋아했다.둘 다 운동을 좋아해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것도 좋았고, 속궁합도 잘 맞아 서로 천생연분이라고 느꼈다. 만난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결혼도 진지하게고민했다. 그러나 3개월 전부터 수위 높은 스킨십이 잦아졌단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아,애정표현인가보다'라고 생각했지만 정도가 점점 지나쳤다. 영화관에서 불이 꺼지면 A의 가슴을 갑자기 만진다던지,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뒤에 있던 남자 친구가 사람들 몰래 A의 엉덩이를 움켜쥔다던지, 차를 타면 허벅지를 쓰다듬다가 은밀한 부분을 터치한다던지 등의 불쾌한 스킨십이 이어졌다. 한 번은 옷 속으로 손이 불쑥 들어온 적도 있었다.A는수치심이 들어 그의 스킨십이 더 이상 애정표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네 인형이야? 싫다는데 왜 자꾸 만져.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그만 좀 해."
"나는 네가 좋아서 그러는 건데, 그게 그렇게 싫어? 애정표현이잖아."
"그게 어떻게 애정표현이야? 아무리 우리가 커플이라지만수치심을 주는터치는 성추행이야. 알아?"
"뭐? 성추행? 남자 친구한테 성추행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이 문제로 싸우기 수십 번.사랑해서 그러는 건데 대체 뭐가 문제냐는 남자 친구의 태도에 A는 지친다고 했다.행동은 덜 해졌지만도무지 뭐가 잘못됐는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A는한숨을 푹 쉬었다. 이야기를 들은 은수 씨와 친구들은 기함했다. 애정표현은 개뿔. 커플끼리 은밀한 스킨십을 할 수는 있지만, 싫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쾌감을 주는 접촉은 성추행이 분명하다며 모두가 열을 냈다. 더군다나 사랑이라는 빛 좋은 변명 하에 A를존중하지 않는태도가참으로뻔뻔했다. 기본적인 개념 자체가 없는 놈이라며 친구들과 분개하던 중 은수 씨는불현듯 어떤 기억이 스쳤다.비슷하고도개 같은 기억이.
20살 여름방학. 은수 씨는 동기 언니의 소개로 5살 차이 나는 같은 학교 사람과 썸을 탔었다. 당시 그녀는 연애 경험이 전무했기에 매우 순수했다. 한 번은 남자가 술을 마시던 도중에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무슨 영화 보고 싶은데?"
"아찔한 상견례"
"그거 작년에 개봉했던 거 아냐?"
"응그렇지?"
"엥?그럼 영화관에서 못 보잖아"
"DVD방 가서 보면 되지. 옆에 있잖아"
은수 씨는 본능적으로 이상 신호를 감지했지만 'DVD방'이라는 단어에 든 불순함은알지 못했다. 단순히 '영화 존나 좋아하네'라고 생각했을 뿐, 순진했다. 그리고 얼마 뒤 영화관에서 그 뜻을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