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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Jul 19. 2022

노력 없이 성과를 이루고픈
백수의 나날

다섯 번째 단짠레터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분명 얼굴 시린 겨울이었는데 어느새 더운 여름이 되었네요. 브런치에 주기적으로 글을 쓰겠다던 하찮은 제 다짐을 믿고 계셨던 분들에게 먼저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 제가 무얼 하고 지냈는지 혹시 궁금하셨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4년 다닌 회사를 퇴사하고 백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난 단짠레터에서 번아웃을 크게 겪었다고 고백했었죠. 사실 그 글을 쓰면서 퇴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괴로움의 굴레를 끊어내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슬프지도 않은데 출근하면 계속 눈물이 흘렀거든요.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이 끊어지기 전에 저는 결정을 해야 했고, 그렇게 도망치듯 회사를 나왔습니다.


스타트업 오픈 멤버로 시작해 핵심 인력이 되기까지 정말 많은 일을 했습니다. 회사는 제게 항상 기회를 주고 책임감과 추진력을 심어주었지만, 정작 저는 거기에 발목 잡혀 더 이상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데도 잘할 수 있는 척 거짓 연기를 지속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건 아니었어요. 분명 즐거운 순간들도 있었죠. 하지만 3년이 지나니 타성에 젖어있는 제가 견딜 수 없었고, 이해되지 않는 윗선의 지시도 더 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벌써 퇴사한 지 4개월이 흘렀네요. 황폐해진 제 마음에 물을 주고 새싹이 피어날 수 있도록 열심히 가꾸는 중입니다. 역시 백수가 체질인 것 같아요. 시간이 많아지니 어디든 놀러 다닐 수 있는 게 정말 좋습니다. 전시회나 맛집, 웬만한 핫플을 지도에 저장해 두고 다니는 게 요즘 일상이에요. 술도 거침없이 마시고 있습니다. 제가 애주가라 낮술도 가리지 않거든요. 그러다 보니 글쓰기에 소홀해졌습니다. 사실 퇴사한 뒤로 일과 관련된 것들을 모두 차단한 채 지냈습니다. 노트북도 전혀 키지 않았어요. 저의 글쓰기 원동력은 우울함인데 요즘 해피한 일상을 보내고 있어서 쓸 말이 없었습니다. 이해해주세요 여러분.


또다시 백수가 되었지만

사실 다시 백수가 되기까지 큰 결심이 필요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강제 백수였던 시절이 정말 지독했거든요. 서류만 수십 군데를 넣었지만, 그중 합격 통보는 손에 꼽았고, 최종까지 갔던 면접에서도 모두 떨어지면서 패배감이 온몸을 뒤덮었습니다. 사회에서 바라보는 는 아무것도 아니었죠. 나라는 사람을 자꾸 구석에 몰아세우면서 그렇게 땅굴을 파고 들어갔습니다.


지금도 이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안 좋아요.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 물론 지금은 그때와 다르게 커리어와 경험, 돈이라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을 알게 됐고, 불확실한 미래는 결국 현재의 내가 뚫고 나가야 된다는 것도 배웠죠. 같은 백수지만 물질적, 정신적으로 성숙해졌기에 백수의 삶을 잘 즐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요. 다시 현실이란 벽에 부딪히면 또 모르겠지만, 현재의 저는 행복합니다.



노력 없이 성과를 이루고 싶은 마음. 일을 안 해도 탁탁 통장에 돈이 자동으로 꽂히는 삶. 웃기게도 백수가 되니까 더 강렬하게 꿈꾸게 됩니다. 그러려면 현실을 배로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말이죠. 그런 면에서 백수의 삶은 참 양면적입니다. 휴식과 나태, 시간과 돈 사이에서 줄타기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사람마다 우선순위가 다르고,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 다르기에 뭐가 중요하다 말할 순 없지만,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언제든 할 수 있다는 점은 확실히 매력적입니다. 이미 저는 백수란 늪에 깊게 빠져버렸나 봅니다. 걱정하진 마세요. 잠식되지 않게 계속 경계하겠습니다.


일단 하루하루, 오늘 느끼는 행복을 당분간 좇겠습니다. 멀리서 보면 현재가 찰나의 순간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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