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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Jul 21. 2022

서울을 추앙해요

일곱 번째 단짠레터

혹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보셨나요? 지금은 종영했지만, 방영 당시 저는 거의 현생 불가일 정도로 빠져 살았었습니다. 일상에서 나도 모르게 느꼈던 감정들을 어찌나 대사로 잘 표현해주던지. 매회 공감 가는 장면들이 정말 많습니다. 특히나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삼 남매의 모습이 과거의 제 모습과 겹쳐 보여 더 몰입했었죠.


제가 브런치에 썼던 첫 글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까요? 강남과 인천을 왕복 네 시간 동안 출퇴근하던 일에 대해 썼었습니다. 그 글을 쓰고 1년 뒤 저는 꿈에 그리던 독립을 하게 되었어요. 그것도 서울로요. 물론 서울의 집값이 호락호락하지 않아 집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제 몸 하나 따뜻하게 뉘일 수 있는 작은 집을 운명처럼 찾아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가장 울림이 컸던 대사 중 '추앙'이란 단어가 등장해요. 미정(김지원)이가 삶의 어떤 목표도 의지도 없던 구 씨(손석구)에게 본인을 추앙하라고 하죠. 사랑보다 더 큰 마음, 재고 따지지 않는 절대적인 헌신, 무한한 믿음, 그 어떤 것도 감수할 수 있는 아가페적인 사랑이 바로 추앙입니다.


문득 나는 어떤 대상을 추앙한 적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런 대상이 나타난다면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회의적인 인간인 데다가 의심병 환자라 미정이처럼 사람을 추앙해본 적도, 해볼 의지도 없습니다. 대신 한 가지는 추앙할 수 있겠더라고요. 지금 저의 삶을요. 더 정확하게는 자유를 만끽하게 해 준 서울을요.


저는 오랫동안 자유를 꿈꿔왔어요. 경제적, 정신적으로 독립된 생활, 뭐든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삶,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고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인생. 서울은 이 모든 게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서울은 제가 바라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과 자유라는 최종 목표를 이루기에 최적의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니까요.


북악산에서 바라본 서울


서울은 참 신기합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정치, 경제, 역사, 예술, 문화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어요. 광화문에 가면 높은 회사 빌딩 사이로 위엄을 간직한 경복궁을 거닐 수 있고, 그 옆 이어진 갤러리에서 가슴 뛰게 만드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강남에 가면 삭막한 회사 숲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지만, 쇼핑몰과 맛집이 즐비한 화려한 번화가에서 잠시 숨을 돌릴 수도 있고요. 을지로에 가면 낡은 인쇄소 골목에서 젊음과 청춘을 즐길 수 있습니다.


누구는 서울이 답답하다고 하더군요. 너무 모든 게 과하다고요. 사람, 차, 건물뿐만 아니라 빠르게 변하는 사회 속 도태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은 분위기까지. 또 누구는 서울에서의 삶은 그저 팍팍하기 그지없다고 합니다. 겨우 발 붙이고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있을 뿐, 딱히 희망 따윈 없다고요. 공감합니다. 서울은 쉽게 자기 품을 내주지 않아요. 게임처럼 계속 퀘스트를 통과해야만 서울에 있을 자격이 주어지는 것 같거든요.


저 또한 서울에서의 삶이 항상 낭만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갑자기 대출이 막혀 집을 못 구할 뻔했고, 오래 함께할 것 같았던 정든 동료들을 모두 떠나보내야 했으며, 처음으로 같이 살고 싶었던 애인에게는 비참하게 차였고, 그 와중에 서툰 투자로 돈도 날렸었습니다. 웃었던 날만큼 눈물 흘리던 날도 많았어요. 그렇게 좋아하던 서울의 밤공기와 화려한 네온사인이 때로는 공허하게 느껴졌습니다. 뻥 뚫린 가슴속을 뭐라도 채우기 위해 술만 퍼마셨던 나날들. 회색의 인간들 틈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제가 가끔은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울을 추앙해요. 미정이가 구 씨의 배경과 아픔을 모두 포용하고, 오히려 구 씨에게 받은 상처를 구 씨에게 위로받았듯이 저도 제가 서울에서 겪었던 상처를 모두 치유했습니다. 저는 한층 저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서울에서의 모든 시간이 정말 소중해요. 누리고 싶은 게 무엇인지,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지, 앞으로 취해야 할 인생의 태도를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뭐든 부딪히고 경험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제게 서울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최고의 선생님인 셈이죠.


이 정도면 저 추앙하는 거 맞죠? 추앙하는 대상이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 느낌이 여러분에게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제가 서울을 추앙하는 만큼 서울도 저를 추앙해주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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