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물길

무너지는 언덕 위의 도시*와 시지프스의 반항**

by 이제월



1월 20일, 워싱턴 D.C.의 의사당 계단에서 4년마다 거행되는 대통령 취임식은 오랫동안 ‘언덕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로 불리던 미합중국의 위엄을 상징해 왔습니다. 전 세계는 그들이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절차와 가치를 정답지처럼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2026년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풍경은 사뭇 다릅니다. 경제 지표는 여전히 가장 부유한 나라를 보여주고, 군사력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지만, 이 거대한 산맥을 지탱하던 ‘가치의 중력’이 작동을 멈춘 듯한 기이한 부조리를 마주합니다.


사라진 보편적 규범: 부조리의 탄생

미국이 세계에 투사해온 가치들 — 인권, 다자주의, 관용, 그리고 정당한 절차 — 은 2차 대전 이후 대략 80년간 단순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보편적 규범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미국은 이러한 규범을 스스로 해체하고 '자국 우선주의'라는 현실적 이익의 돌덩이를 밀어 올리는 데 집중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카뮈가 말한 부조리는 바로 여기서 발생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미국이 세계의 도덕적 리더이길 기대(인간의 열망)하지만, 실제 미국이 보여주는 행보는 차갑고 무관심한 자국 이익의 관철(세계의 침묵)일 뿐입니다. 이 엇박자 속에서 '위대한 미국'이라는 신화는 이미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껍데기만 남은 채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미국은 사라졌는가?

만약 '위대함'을 타국에 대한 도덕적 영향력과 보편적 가치의 수호로 정의한다면, 그 미국은 이미 상당 부분 침식되었을지 모릅니다. 국제 사회는 이제 미국을 '배울 만한 모델'이 아니라 '협상해야 할 거대한 힘'으로 대하고 있으니까요. 보편적 규범이 무너진 자리에 남은 것은 각자도생의 논리이며, 이는 인류가 오랜 시간 쌓아온 민주주의라는 바위가 다시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듯한 허무함을 줍니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카뮈가 시지프스를 통해 보여준 통찰을 기억해 봅시다. 바위가 굴러떨어졌다고 해서 시지프스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바위가 떨어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카뮈는 '반항'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존엄을 발견했지 않았나요.


가능성들: 부조리 속에서 다시 밀어 올리기

미국이 가졌던 보편적 가치가 흔들린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첫째, 가치의 내재화. ’미국이 이끄는 세계'라는 외부적 질서에 의존하는 대신, 각 국가와 시민사회가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가치를 자신의 삶 속에서 스스로 발명하고 지켜내야 하는 '반항'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둘째, 새로운 연대의 발견. 미국의 독주나 모델이 무너진 빈자리에 다양한 문화권의 가치들이 수평적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보편성을 만들어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셋째, 환상 없는 직시. "미국은 늘 옳다"는 환상을 버리고, 부조리한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는 뫼르소처럼 2026년 세계 각국과 시민 들은 냉정하게 국제 정세를 직시할 힘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위는 다시 밀어 올려질 것이다

'위대한 미국'은 현재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바위는 언제든 굴러떨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바위를 밀어 올리는 동력이 특정 국가의 힘이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전 세계 시민들의 '연대하는 반항'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1월 20일의 취임식은 이제 더 이상 한 나라의 자신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무너진 규범의 파편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다시 밀어 올릴 것인지 묻는 엄중한 질문의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인권? 자유? 평화? 여기에서 따라할 어른은 없습니다. 미숙한 청소년 청년들만 모여 있는 것입니다. 쥘 베른(Jules Vern, 1828-1905)의 소설 『Deux ans de vacances』(2년간의 휴가. 그러나 한국에서는 『15소년 표류기』로 출간되어 널리 읽힘)처럼, 우리는 어른이 없는 섬에 떨어져 자기들끼리 세계를 구성해가는 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방인』의 뫼르소나 『페스트』의 의사 리외, 혹은 『시지프 신화』의 시지프나 다 정답을 모르지만 자기 나름의 저항을 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밖에 못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반항해 봅시다. 잘은 모르지만.





*무너지는 언덕 위의 도시는 ‘로마’를 가리킵니다. 고대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과 문명, 제도에 의해 지중해 세계가 번영했던 것을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라고 하는데, 이 로마에 의한 평화에 비겨 ‘미합중국에 의한 평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이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을 오랜동안 서구사회가 현실하는 이상향처럼 바라본 ‘언덕 위의 도시’ 로마에 비겨 불러보았습니다.


**시지프 혹은 시지프스는 그리스 신화에 처음 등장하지만, 알베르 카뮈가 <부조리에 관한 시론>이라는 부제를 달고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라는 책을 써서 그려낸 내용을 원용하였습니다. 카뮈는 인간이 철학적 자살에 해당하는 회피를 선택하거나, 포기를 선택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의미를 찾을 수 없지만 행동하는 ‘반항’을 할 수 있다며, 이 반항이야말로 인간 실존을 구원할 거라고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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