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어둠의 기사 삼부작에 대한 잡설
*2012년 11월 24일 글을 캐내서 수정 없이 올립니다.
배트맨의 불온성은 아나키에 있다/있지 않다.
아나키는 태어난 뒤로 항상 골치거리였다/희망이었다.
마치 사정한 남성처럼 (망측해라!)
혁명가들조차 바라던 것을 이루고나면
질서를 세운다며 변화를 꺼렸다. (자려고만 한다.)
배트맨 그리고 가면 쓴 코믹스의 히어로들은
질서의 작동 범위를 벗어난다.
멋대로 판단한다, 감히. (나도 못해, 그러므로 너도 하지 마.)
그들은 위험하다.
(감시자들은 누가 감시하지? –앨런 무어, Watchmen)
더구나 배트맨은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모순됐는가! (둘은 같은 말이다! 곱빼기다, 곱절!)
그는 일껏 경찰을 무시하고는
처단을 완료하지 않은 채
붙잡은 범죄자들을 경찰에게 데려다 준다.
(이건 경찰이 잡은 건가, 잡지 않은 건가?)
그는 스스로 법 밖에 서서는
법이 바로 움직이길 기대한다.
낭만적인가, 골이 빈 걸까, 놀리고 있나?
어쨌든 외부자가 내부에 대한 관심을 끄지 않는 한
그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에게는 외부가 내부이고, 내부가 외부인 게 성립한다.
밥 케인은 참 놀라운 괴물을 창조했다.
만약 영어에서 매력attract의 어원이
결여에서 나왔다는 해석이 옳다면,
그는 동시에 가장 매력적인 인물을 만든 셈이다.)
혼자 동굴 속에서 징징대는 꼴이라니!
그러나 그는 이상할지 모르지만
악하거나 어리석지 않다.
그는 고민하고 궁리하고 추리하고
애쓴다, 끝없이.
그에게는 보기 드문 미덕-인내가 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씌운 제약-진실/원칙들에 의해
능력을 제한한다. 하지만 그래서 그는
잘 익은 국처럼 깊은 맛을 낼 수 있다.
오랜 장처럼 곰팡이가 슬어도 이겨내고
다른 것이 섞여도 흡수하고 동화시킨다.
바보같긴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투사다.
이 모순적 인물은.
질문은 이미 배트맨을 영웅으로 삼은 뒤여서는 곤란하다.
그를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릴지, 그 자체부터 묻는다면
다크나이트에 대한 새로운 읽기가 가능하다.
영화를 훨씬 대상화하는 이 방식은 역설적으로
안으로 깊이 들어가, 그 세계(고담시)의 주민이 돼서
배트맨을 보는 경험이다.
그랬을 때, 그는 누구인가?
다크나이트 스스로가 일어서는 이야기인가,
다크나이트가 민중을 일으키는 이야기인가?
배트맨 비긴즈는 고담시가 어둠의 기사를 낳는 이야기이다.
다크나이트는 어둠의 기사가 고담시를 낳는 이야기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만큼이나 두 존재는 서로를 내포하고 있다.
어쩌면 조커가 옳다, 둘이 서로를 ‘완성’시킨다.
그렇지만 영화 속 세계에서 다크나이트의 은퇴(라는 말이 맞다면) 이후
8년에 걸친 기형적 평화는
배트맨의 존재 여부를 떠나서 고담시가 악을 부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 평화는 가짜이며,
어떤 의미로 모든 고담시는 가짜다.
오늘 나는 배트맨과 오바마를 연결시킨 평론을 읽었다.
흥미롭다.
이런 게 가능하다면 나 또한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배트맨을 주인공으로 삼을지부터 되묻자고 한 것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팀 버튼의 두번째 배트맨(배트맨 리턴즈, 1992년작)은
배트맨보다는 캣우먼이며, 펭귄맨이며 악당들이 주인공이었다.
팀 버튼 감독은 배트맨을 핑계 삼아, 그를 문 삼아서 기형적 인물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에 대한 애정을 한껏 과시한 바 있다.
생각해보면 크리스토퍼 놀란도 어둠의 기사가 결국 필요없어지는 것을 희구해왔다, 시종일관.
그가 리부트한 배트맨 첫 편은 알프레드와 브루스 웨인의 대화를 빌어 처음부터 이 괴상한 차림새의 범죄자 잡기 놀음이 ‘상징’을 만들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보통 상징은 긴 시간 집단의 보편적 경험과 다층적이고 동시적인 해석에 의해 인류학적 맥락 하에 생겨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브랜드’를 ‘생산’하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브루스 웨인쯤 되면 홀로 그런 브랜드를 만들 만하다. 게다가 그는 (다크나이트의 대사를 빌면) 하키복 따위 입지 않는 진짜다, 알맹이가 있단 말이다. 명실상부.
놀란의 삼부작이 바라는 상징은 무엇인가? 다크나이트에서 그것이 무수한 짝퉁 배트맨의 ‘따라하기’가 아니란 점은 분명해졌다. 브루스 웨인은 그 현상에 대해 ‘바라던 게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으며, 그런 고민 탓에 성급하게 ‘백기사’를 원한다. 어떤 면에서 하비 덴트가 투페이스가 된 것은 전임 아니, 현직 기사가 인수인계를 서두른 탓도 있을 것이다. 도시를 지키는 기사는 응당 스스로 ‘표적’이 되어야 하는데, 그는 너무 서둘러 특정인-이 경우, 검사 하비 덴트를 표적으로 만들어버렸다. 조커의 광기가 하비 덴트를 향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판사, 경찰청장을 함께 노린 데서 미루어 그것은 공적으로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크나이트의 빠른 템포가 레이첼과 하비를 동시에 위험에 빠뜨렸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배트맨은 비록 거짓을 동원하지만 짐 고든과 공모하여 하비 덴트를 백기사로 삼고 자신은 조커에 필적하는 악으로 규정되길, 주저없이 택한다. 살신성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의 판단의 정확함을 따지기에 앞서, 그건 분명 어떤 군자의 품성이다. 오랫동안 진심으로 갈고 닦아온 데 따른 빠른 판단, 즉각적인 행동. 그러나 그것이 그를 병들게 한 것도 사실인 것 같다. 그렇지만 어둠의 기사의 세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깨끗한 에너지’ 개발과 실패에 얽힌 사연은 그가 한쪽 펀치를 맞은 것만으로 쓰러진 건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비록 그가 레이첼을 상실하여 이제 더는 세상에 끈을 갖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그는 단순히 사적인 복수에 집착했던 것이 아니므로, 리벤지에 얽힌 다리는 꺽였어도, 다른 한쪽 적극적 어벤지에 있어서는 살아 있던 것이다. 그런데 그마저 수월찮으니 모습을 감추고 만 것이다. (이 점은 배트맨이 잠적한 기간은 8년이지만, 브루스 웨인이 잠적한 것은 그보다 짧고, 대체에너지 개발의 실패와 관련됐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아무튼 돌아온 어둠의 기사는 죽거나,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필연인데, 브루스가 개인적 삶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시종일관 추구해온 것에 그 자신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상징’을 원했지, ‘우상’이 되려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실제의 해결사도 원치 않았고, 관념적 우상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둘 사이 모순에 빠져 있었고, 결국 사라져야만 했다. 다크나이트가 대낮에 광장에서 싸우기 시작한 순간 이미 다크나이트는 퇴장할 준비를 갖춘 것이다. 강제적 퇴장 자격. 링 위에 오르는 계량이 아니라 링에서 내려가기 위한 계량.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국가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국가의 통치 원리나 구조는 다르게 구상했을지라도 국가주의는 기본적으로 ‘해결책’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난세를 딛고 통일을 이룬 인물들은 영웅들 중의 영웅으로 불리운다. 통일의 영웅은 있어도 분열의 영웅은 없다. 노예 해방을 이룬 링컨은, 남북전쟁의 결과가 두 국가의 성립이었다면 반쪽짜리 영웅 신세를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어쨌거나 한 국가를 유지했으므로, 남과 북을 통일했으므로 여전히 영웅 취급을 받는 것이다. 그의 공과는 영웅의 공과이지, 그를 영웅으로 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근대를 지나면서 다른 한 기류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사실 그것은 문자로 기록된 역사 이전 즉, 선사시대에는 더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이었으며, 북미 대륙의 원주인들에게 당연한 것이었고, 완성된 것이었고, 실제 작동하는 생활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서구 근대의 비판적 사유가 가져온 개인주의로 환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반국가주의가 아니라 비국가주의다. 국가주의의 그늘인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종(種)으로서 독립적인 선택지로 현실해온 것이다. 아나키즘.
그것은 단순히 서구가 선택한 근대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문제를 집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인류가 고안해낸 두 방법 중 하나로서, 국가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파괴적 테러리즘과 동일시할 가벼운 무엇,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주의가 독재를 통제하는 무수한 방식을 유혈로 실험하는 동안,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민주주의로 돌아오는 동안, 아나키즘은 이만년 동안 그들 자신이 거북이섬이라 불렀던 아메리카 대륙에서 처음부터 민주적이고, 처음부터 공동체적이고, 처음부터 평화롭고, 처음부터 탈권위적이며, 처음부터 영적으로 작동해왔다. 그들은 공산주의가 아니어도 공유할 줄 알았고, 자본주의가 아니어도 개개인의 노고의 열매를 인정할 줄 알았다. 사실 인간 정신은 이쪽에서 덜 기형적이다. 국가주의 안에서 벌어진 역사라는 것이, 영웅놀음이라는 것이 결국 유혈의 정신병적 역동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어느 쪽이 정상이고 어느 쪽이 비정상인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정상 사고’는 아메리카의 WASP(White Anglo Saxon Protestant)가 대서양 건너 유일초강대국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그 정신을 ‘헌법’으로 새겨 넣을 때, 당연히, 부득이하게,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에는 더욱 자연스럽게 배어들었는데, 이는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사실상 인종 청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일이다. 그들은 미워하고 배격하고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접촉과 교류의 결과를 자기들 안에 안게 되었다. 그런 미국인들이 군대에 의해서 마지못해 공교육 시스템을 받아들인 것도 당연하다. 그들에게 그런 국가주의 방식은 ‘독립’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나름의 방식대로 자유롭게 배우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국가는 처음부터 그런 모순과 자기 배반을 기초에 두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 경험을 가진 나라에서, 더구나 생겨난 이래 여지껏 인간이 가장 강한 힘-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한- 기술 문명을 가진 시대에, 반복해서 타자에 대해 승리의 경험을 간직한 그들이 나르시시즘과 더불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건 자연스럽고, 더욱이 그것이 ‘가정’이 아니라 그들이 경험 혹은 목격한 ‘전설적’ ‘현실’인 경우라면, 이건 정말 자연스럽게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까?
이른 바 미국적 히어로들의 태생에는 20세기를 물들인 제국주의의 영향도 짙지만, 그들이 전 국토에 뿌린 인디언 아나키의 피도 짙게 배어 있다. 그 중에서도 이 복합적인 캐릭터, 인위적으로 권능을 손에 넣었지만, 어디까지나 최종 결정은 그들 집단에게 되돌리는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인, 타자, 가장 왓치맨다운 왓치맨. 고담시의 어둠의 기사는 엄격히 말해서 어떤 체제도 지지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체제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개인들은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개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동시에 개인들에게 그들이 강할 수 있고, 그들의 연대가 강할 수 있다는 걸, 그들의 선택은 ‘원한다면’ 입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원한다면 ‘지켜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한다.
서울시에서 북촌으로 알려진 지역의 언덕받이, 행정구역상 가회동일 곳을 지나다보면 ‘거인’이라는 시가 어느 집 벽에 적혀 있다. 그것은 아마 유리벽인 것 같다. 일부러 그 앞을 지나기도 하고, 가만히 서서 마음으로만 그 앞에 서기도 하지만 정작 그 정확한 풍경이 떠오르지 않는 건, 나에게는 그 시 자체가 울리는 소리가 평소에는 한없이 의존하는 시각적 형상을 모두 흔들어 부숴놓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시는 ‘기도는 뭔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나/ 내 안에 숨어있는 거인을 불러내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배트맨이 ‘상징’이 되고자 한 것은 정확히 일치하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 안에서 ‘숨어있는 거인’을 불러내는 것을 기도한 것이리라. 배트맨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나? 당신은 지배받지 않아도 된다, 당신들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 당신들은 스스로 하고, 필요하다면 서로를 도와 함께 해라, 그리고 그러므로 나는 당신들의 선택에 간여하지 않겠다, 나는 내가 할 일을 하고, 내가 믿는 일을 하지만 모든 판단은, 당신들의 세계이니 당신들이 결정하라.
어린 왕자는 (그를 우리에게 보내준 생-텍쥐베리에게 감사한다!) 자기가 떠나온 B612 소행성에 두고온 장미 한 송이 때문에 고민이 많은데,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다음과 같은 지혜를 들려주었다. “그가 하는 말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라고. “꽃은 너에게 향기를 주었다”고.
만약 우리가 스스로의 삶에서 방관자가 되어 다른 이의 행동이 전부라고 여긴다면, 그래서 그가 일껏 내 삶에 부딪쳐 벌인 ‘행위’를 내 삶의 경계 바깥에서 벌어진 ‘말’로 멈춰세운다면, 그래, 배트맨은 악마 같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멍청한 보이스카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보상을 바라지 않고 한결같이 한 그대로, 그리고 영화니 코믹북을 통해 속 편하게도 작가가 선사해주는 전지전능한 관점까지 가진 관객일 때에는 더욱더 그의 속까지 들여다보았으니, 그의 행동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놀란 감독은, 확실히, 그가 참조했다는 <메트로폴리스>의 프리츠 랑처럼 순진한 구석이 있다. 혹은 순진한 것이 아니라 영리하게 아예 기득권을 편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영화 감독이 어떻게 하든, 그래픽노블의 작가가 어떻게 하든 그들이 배트맨을 부른 이상, 배트맨은 배트맨이다. 그 캐릭터의 힘은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완성된 인격이어서, 그들이 배트맨을 배트맨으로 두는 이상, 그들이 바라건 바라지 않건, 시켰건 시키지 않았건 배트맨은 배트맨으로 행동하고 있다. 이건 아주 섬세한 문제여서 간단히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복합적이고 세월을 통해 정련된 캐릭터는 하나를 건드리면 전부 다 무너져버린다. 놀란 감독이 코믹북 팬보이 출신이 아님에도 배트맨을 아주 잘 그려낼 수 있던 건, 다른 한편,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는 배트맨을 만났고, 배트맨이 하지 않을 행동을 하게 했다가는 영화가 망해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그는 배트맨을, 자기 관점에서 그릴 지언정, 배트맨인 채로 둘 수밖에 없고, 바로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 어둠의 기사를 온전히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어둠의 기사는 국가주의와 아나키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미국 코믹북의 여러 영웅들 가운데서 누구보다도 반골 기질이 강한 인물이다. 슈퍼맨이 말 그대로 국가주의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레드 선>에서도 체제 붕괴를 꿈꾸는 역할은 배트맨이 맡는다/맡을 수밖에 없었다.
놀란 감독판 어둠의 기사 삼부작 세계의 구성에 큰 몫 하는 프랭크 밀러의 원작들(‘배트맨 이어 원’, ‘다크나이트 리턴즈’, ‘다크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도 시종일관 국가주의를 의심하고 이를 파탄내며, 운명의 손잡이를 시민들에게 돌려놓으려는 배트맨을 그리고 있다. 그가 어둠의 기사인 것은 국가주의 세계에서 국가주의의 광명을 거부하는 탓도 있다.
배트맨은 위선자인가?
배트맨은 정신병자이거나 광신도인가?
배트맨은 체제 수호자요, 어리석은 소년인가?
그랬던 순간이 있는지 모르지만,
배트맨은 코믹북이 창조한 모든 인물들 가운데
지금 우리에 가장 가까운, 비록 인류의 스승 급에 드는 어른은 아니라도,
우리의 번민과 질곡을 가장 잘 알고, 가장 깊은 절망을 경험하면서도
결코 희망을 놓지 않는,
어깨를 맞댈 만한 어른이다.
나는 그를 여전히 유아기의 트라우마에 갇힌 부잣집 아들로 가둬두려는 모든 평론에 반대한다.
배트맨은 성장했고, 우리에게도 성장할 것을 요구한다.
나는 수첩 맨 앞에 뭐랄까, 선동하고 자극하는 어구를 적어놓는 버릇이 있는데,
이런 말을 적은 적이 있다.
“내가 평범하다는 것이
위대한 꿈을 꾸는 것을
막지 않는다.
이것이 시작이다.”
배트맨은 우리의 상처가,
우리의 내핍과 외핍이
핑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똑같은 그것이
우리들 희망의 이유라는 점도 같이 보여주었다.
배트맨하고라면
술 한 잔, 장기 한 판
같이 할 마음이 드는 이유다.
*’거인’ 전문
거인
사람들은 기도를 무엇을 구하는 것이라 여기네.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기력 할 때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 속에서 더 이상
내 안을 비추는 따뜻한 빛 찾을 수가 없을 때
답답함이 세력을 얻어 숨조차 쉴 수 없을 때
내일이 안 보이는 깜깜함에 갇혔을 때
어딘가에 매달려 사람들은 기도하고 싶어하네.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한때 내가 미워했던 사람과
한때 나를 힘들게 했던 그 모든 벽들과
벽들이 갈라놓은 질식의 공간과
저녁의 식사와 아침의 푸른 공기 사이에 박혀 있는
갈구(渴求)의 절박함
그러나 기도는 뭔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네.
기도는 또 하나의 나
내 안에 숨어있는 거인을 불러내는 일이라네.
詩 김재진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