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단락, 그리고 최종 해명
놀랍게 변용된다. 노래의 시작은 ‘고향’이었지만, 이제 ‘고향집’이다. 노래하는 이는 애초 자신이 사는 곳이 있다. 앞서 그림으로도 상기(想起)한 바대로 고향은 고향이고, 고향의 좌표는 과거 또는 미래로 잡힌다. 왜냐하면 고향이란 여기 있으나 여기 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고향은 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어릴 적 그 고향은 이미 변하여 없으며, 내가 마음 깊은 데서 바라는 그 고향은 또 어디 멀리 있는 것으로 나의 꿈 속에나 있고, 혹은 내가 꿈을 확장하여 만나게 되는 곳이다. 반면 집은 지금 내가 사는 곳이며, 여기서 새로운 나의 가족을 꾸렸다. 나의 책임도 나의 경험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고향은 비록 노부모가 생존한 탓에 아주 끈이 떨어진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허상 같다. 그런데 그는 고향과 집을 갑자기 합친다. 그가 이번 고향 방문에서 얻은 것이 이것이다. 고향과 집을 합치는 깨달음. 어떻게 된 일일까?
고향은 본래 집과 대립한다. 고향은 영원의 거처이고, 집은 현재의 거처이다. 그런데 고향을 영원성의 상징으로 삼았지만, 이 성사적 변용에 대해 한 가지 빠뜨린 이야기가 있다. 빠진 고리[missing link]. 바로 성사는 저 너머의 것과 이쪽의 것이 결합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고향 역시 영원성으로서의 고향과 현재하는 고향 둘 다가 있다. 고향이 참으로 영원하며,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오려면 현재밖에 다른 문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그리고 영원에 속하지만 현실에도 속하는 고향은 어떻게 해서 두 개의 좌표를 가지는가? 그 둘은 다른가? 하지만 같은가?
(첨부한 그림 3 참조)
과거로서 나의 집 미래로서 체험 세계
기억된 고향 나의 현재 꿈꾸는 고향 둘(분리) 세계
영원이며 현재인 고향 깨달음, 알아차림의 세계
즉, 고향+집=고향집 하나(일치) 세계
이로써 가장 먼 과거인 고향과 가장 먼 미래인 고향은 두 개의 좌표로 나타나지만 실은 영원한 고향으로서 단일한 좌표를 가짐이 드러난다.
빅뱅의 장소, 우주가 시작된 곳의 좌표를 아는가? 사실 여기에는 어떤 계산도 필요 없다. 지금 바로 당신을 안내하겠다. 지금 여기. 당신이 선 곳. 우리가 사는 곳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우주가 정말로 한 점에서 시작한 것이라면 최초의 좌표는 하나뿐이며, 그 좌표가 팽창한 것이 온 우주이기 때문에 실은 우주의 모든 장소가 바로 최초의 한 점, 빅뱅의 좌표다. 이승과 저승은 떨어져 있지 않으며, 찰라의 순간들도 영원의 그림자다. 하나도 이상할 것 없고, 조금도 무리하지 않다. 사실 이것이 가장, 아니다, 오로지 이것이 자연스럽다.
고향을 고향집으로 재발견하는 것. 이 노래가 보여 주는 놀라운 현실이다. 시인은 이 여행을 통하여 이런 때가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다고 저절로 반복될 리는 없지만, 한 번 강력히 체험함으로써 마침내 먼 미래로서 꿈꾸거나 혹은 꿈꾸기를 포기한 고향을 회복하고, 당도하고, 재일치할 기운을 얻는다. 왜냐하면 고향은 때마다 집을 떠나 찾아가는 유적이 아니라 오직 고향집, 내 존재가 응축된 그 한 점, 전부이기 때문이다. 고향집은 전부이므로 나는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아무리 멀리 떨어질 때라도 실은 하나도 떨어지지 않은 채 단단히 묶여 있다. 이 자유와 속함의 이중주는 우주라는 교향곡 전체에도 적용된다. 고향집에서 그 지극한 사랑을 받아왔음에 따라 호명된 ‘사랑하는 막내아들’은 이제 다른 뜻으로도 같은 이름으로 호명된다. 그는 어디에서나 누구, 무엇을 막론하고 그를 ‘사랑하는 막내아들’이다. 그는 고향집에 살며, 고향집이며, 고향이 되었고, 세계를 고향으로 이끄는 존재다.
우리의 미미함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주의 막내다.
우리의 인식은 지금 느끼고 괴로워하는 것 같은 처절한 분리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재일치, 이렇게 해서만 이룰 수 있는 온전한 일치 때문에 타오르고 있다.
노래하는 이에게 고마워하며
벗에게, 이 알아차림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