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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Oct 18. 2023

즉흥 글쓰기 | 환대의 집

환대의 집

환대의 집



처음이 아니다. 거품을 뿜는 저 얼굴. 얼굴. 얼굴들.

거품을 마신 거다. 시작은 다 다르다.

아예 다르다고 우기기도 하지만

똑같다. 거품을 마신 거다.

처음에는 든든하고 기쁨을 느낀다.

한구석 불안함직도 한데 인정하질 않지만

떠올린 것만으로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열에 아홉 알고도 그랬고, 지금도 알고 있다.

열에 하난 말을 못 알아들었거나

스스로 속아서 믿고 있는 거다. 그들은 다른 말과 다른 뜻을 엉켜 두었다. 이쪽은 어제가 되고 저쪽은 배고프고, 어제는 아침, 오늘은 휘발유가 되는 식이다. 늘고 늘어서 못 외울 지경이 되면 그들은 아무 때나 거품을 물고 숨이 막힌다. 말들 사이가 엉키고 길을 잃으면 현실과 정신 사이도 꼬이고 막혀 길이 끊기는 것 같다.


— 이이는?


— 아침부터 계속 이래요.


이상하다. 어제 거품을 잡았고 생각 속에 낀 안개도 얼추 걷우어냈다. 대개 되돌아오지만 다 없앨 순 없다. 그래도 며칠 혹은 몇 주는 잠잠한데.


— 날 언제까지 가둬 둘 거야.


간호사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깡말랐지만 키가 특출나게 커서 잠깐 움츠렀던 어깨를 편다.


—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아요.

    당신이 왔고 당신이 머무는 겁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허공을 보던 눈초리가 입꼬리와 함께 움직인다. 바싹 마른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아 달싹대는 입술을 보다 아, 하며 간호사가 물잔을 입에 대 준다.

그는 마시지 않고 살짝 묻히기만 하고서 낮고 거세게 외쳤다.


— 감히,

    너희가 감히 창조주를 가둬?

    나를 기만해?


나는 지긋이 그의 팔을 쥐며 똑바로 눈을 마주보았다.


— 그러게,

    영감, 잘했어야지.


깨어나는 건 처음이다.

그가 어떻게 해독(解毒)한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불경(不敬)은 이유가 있다. 내 눈치를 살피던 간호사가 얼른 돌아서 밖으로 나간다.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병실이 확 어두워졌다.


— 껄껄.

    이렇게 된 건가?


— 영감, 미안하게 됐어.


그의 그림자가, 손가락과 머리칼이, 눈동자도 소리도 금세 사라졌다.

검정은 아주 기뻐했다.

우리의 죽음 대신 저들의 죽음을 택한 걸 늘 뿌듯해했지만 이 정도로 감탄하고 황홀해 떠는 건 처음 본다.

돌아서는데 이상한 울림을 느낀다. 우릉 우릉.

돌아서기도 전에 끔찍한 비명이 터지고 공간이 찢겨 나갔다.

환대의 집 전부가 찢어지고 있었다.

집이 환해지면서 벽들이 녹아나간다. 곳곳에서 겁에 질린, 분노를 억누른 소리가 빗발친다.


— 미끼를 문 신이 달아났다.


— 신이 돌아왔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어둠은 미친듯이 흩어졌다. 겨우 막아둔 보자기가 풀리고 빛이 쏜아져 들어왔다.

어둠이 찢기듯 우리도 먹은 것을 게워냈다. 더 견딜 수 없었다.

첫 번째 신이 깨어나자 다른 신들도 환해졌다. 빠르게 젊어지는 그들에 우린 오래된 공포가 깨어났다. 이 모든 건 우리가 마침내 그이를 잡았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놓쳤다는 걸 뜻함이지.  나는, 나는 유지할 수 없다. 터지던 내 몸이 다시 뭉쳐졌다. 왜? 목소리가 들린다. 맨처음 그 소리뿐이었고 사랑하고 안심하기까지 했지. 이제는 두려움과 경악, 혐오와 구토만 밀려온다. 그러나 아무것도 토할 수 없다. 나는 텅 비었다. 나는 나조차 아니다. 그런데 왜, 왜 남겨두지?


— 제법이다. 칭찬할 일일까. 거의 내게 가까웠구나. 하지만 거의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라는 것뿐이지. 유지할 수 없어. 잠시라도 있었던 게 놀랍군.


잠깐, 혹은 오래? 물끄러미 나를 뚫어보던 그이가 말을 이었다. 추상같아 바스라지려는 몸을 겨우 버텼다. 내가 아니라 그이가 붙잡은지도 모른다.


— 똑바로. 똑바로. 나는 먹고 먹이랬지 먹고 먹히게 시키질 않았다. 아이야,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


알면서, 또 알면서 묻는다. 더구나 먹힌 자들은 이미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지개가 증거다. 혐오스런 잡탕. 실은 먹고 싶지도 않다.


— 물론 내가 도로 뱉아내게 했지만, 네 입으로 듣고 싶구나, 아이야. 대체 동생들을 왜 그렇게 잡아 먹지 못해 안달이느냐.


아니다. 먹고 싶은 바 없다. 먹어서 한 몸이 되는 일 따위, 그런 끔찍한 건 상상조차 아니했다.


— 사라지라 하였소. 지우라 그리했소.


— 그래서,

    지워도 지우지 못하니 나를 노렸구나.


그는 으스대면서라도 우리라는 법이 없다. 맞다. 정말 그이다.


— 복수(複數)로서 높이는 건 너희의 풍습이지. 아이들이 하는 재미난 짓인 줄 알았는데, 너흰 너무 붙어 버렸어. 보손은 그렇지. 하나 페르미온들을 합치려는 건 무리한 일이었어.


듣지 않는다. 말하기 전에, 내가 말을 떠올리기 전부터 다 들었으면서도 멋대로 무시하고 건너뛴다.


— 나는.


— 나는?


그가 웃는다. 그이가 웃자 정신이 아득해진다. 하마터면 여태 있던 일을 모두 잊을 뻔했다.


— 합치려는 게 아니라 없애려는 거였어. 있지도 않던 걸로 만들려고 했다.


그가 또 웃는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저항한다. 그가 허락한다면 견딜 수 있을 거다.


— 엔트로피. 좋아. 하지만 보존의 법칙을 세운 것 같은데? 옆에 있었잖아, 이애.


말끝마다 아이, 아이, 아이. 온몸이 이글거린다.

처음 먹던 순간을 기억한다. 순결하고 고귀하니 삼키라 했다. 나는 토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다. 무제한의 고통으로 마르고 찢기는 걸 싱글싱글 웃으며 묶어 두었더랬다. 나를 뚫어보고 그이가 말한다.


— 하긴. 착각할 수도 있겠군. 너무 큰 걸 맛보았으니까. 나는 자유야, 창조하지. 너희는, 반면 수호하지. 지켰어야지. 가엾게도 이꼴이지 않니.


예정한 건가?


— 그럴 거 없어. 내가 무얼 감춘 적이 있더냐. 아이들에게는 다 보여 주는걸.


그리고, 다 잊게도 했지. 공정하게도. 자유롭도록. 그리고 짐을 지도록.


— 허허. 이 집은 좋구나.


그이는 말을 돌렸다. 멋대로다. 부서진 집을 곯리는 것처럼 나를 칭찬한다.


— 이 녀석!


그이의 표정이 바뀐다.

이제 눈치 챈 건가.


— 너는 나.


— 나는 너.


나는 뛰어들었다. 보손입자는 극저온에서 위상이 같아진다. 이제 나의 의지는 그의 일부일 것이다.







*

교훈을 위해 남긴다. 이조차 내 뜻이다. 너의 최선이 내게로 돌아올 때 이 모든 게 이루어질 터이니, 있는 것은 있고 없은 것은 없나니, 그제서야 나는 다음을 차비할 터. 나는-늙었다/나는-젊다-영영.







*

우리는 이 글을 모든 입자에서 길어냈다. 원형을 찾기 어렵진 않았다.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아 전부가 같은 곡을 들었다. 모두가 기억하고, 말할 수 있는 대로 옮겨 둔다.




제한 사항 | 5분 기준, 멈추지 않으면 계속 쓰기 가능, 잠시라도 멈칫하면 중단할 것

실제 사용 시간 |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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