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월 Jan 31. 2024

용서는 의지의 행위다

— 이해할 것 없다. 이해했어도 이건 별개다




그대가 싫어하는 일과 불편한 일이 벌어질 때

그대는 아무렇거나

감정을 쏘아댈 상대는 필요없다.

감정을 받아낼 상대가 없어도 좋다.

물론 그래서 그대는 제 불완전함을 미안해할 것이다.

보통의 상대는 눈앞에 발현하는 것은

자신을 ‘향하여’ 발산한다고 간주하기에,

보통은 그렇게 여기는 게 맞고, 유리하기 때문에.


그러나 상대의 습관이 어떠하든

인간의 기본 습성이 어떠하든

당신은 그 원점에서 다만 한 발, 다만 한 뼘이라도

어디로든 뻗을 수 있다.

내딛고서 뻗어도 되고

어느 만큼이건 비틀어도 좋고

돌아서서 나아가거나 드러누워도 된다.

그대는 자신이 자유롭다는 걸

모든 천체가 결국은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떠’ 있다는 것을

이 부유(浮遊)가 자유(自由)의 외형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자유의 내형은 무한히 수렴하고 무한히 발산하는 한 점(알렢, ﬡ).]



그대 자신이 어떠하든

그대는 그것이 어디에도 기대거나

누구의 힘도 빌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끼라.

이것은 애써 노력할 것 없이

아무 억지도 쓰지 않으면 저절로 드러난다.

온 사방에 울려퍼진다.

마음에서, 영혼에서 그것은 말하자면 물리적 우주의 우주배경복사와 같다.


그대는 누구에게도 발산할 것이 없다.

오직 숨 쉬어야 하기에 수렴하고

오직 숨 쉬어야 하기에 발산할 뿐이다. 호(呼, exhale)와 흡(吸, inhale) 날숨과 들숨.

그대를 내어주고, 그러면 세상을 들이마신다.


그저 그뿐이어서

그대가 느끼는 것은 그대의 풍부함이지

그대의 몸과 감각, 그대 자신을 느끼고 기능함이지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러니까 그대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탓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면 그대의 즐거움이고

툴툴댄다면 그대의 별난 입맛일 뿐이다.

그것조차 그러고자 함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타자의 행위를 용서할 수 없다.

그대는 행위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 된 일이구나, 이것은 무엇이구나.


그대는 의지에 대하여만 용서할 수 있다.

그대가 누구의 탓도 하지 않을 때,

사건의 중심에서

스스로 탓일 때에[탓-하라는 게 아니라 탓-이라는 것]

그대는 아주 민감하고 정확하게

상대방 스스로는 알지 못하고, 감지할 수 없는

아주 작은 한 톨 실린 의지마저 감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가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지를 나타낼 따름이어서

경멸하여 똑같이 하찮아지거나

용서하여 본래의 그와 더불어 자신이 존엄한 채 머물거나

선택할 수 있다.


비록 그대가 자연의 질서 속에서

오욕 칠정을 숨 쉴지라도

그대는 근면히 행위를 이해하기를 키우며

홀로 누구의 것이든 실낱같은 의지의 끈들을 용서하라.

함께로서는 자신의 것으로 참회하라.



사람의 정체성이라거나 정신의 연속성이란 건 다분히 환상이다.

우리는 깜박이고 있다.

이것을 다 잇는다면

나와 내가 나인 것처럼

나와 너도 남남 아닌 우리, 하나다.

신에게까지 이어질 일의성(一義性, univocitas).

나누어 겪어도 좋고

이어서 느껴도 좋다.

군무의 어디를 즐겨도 아름답다.


그대는 나중에 구원받지 말고

지금 곧바로 해방하라.

우리는 즐거움 가운데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정과 혼동, 억압 가운데서 기뻐한다.

거짓 없는 진짜이니 기쁨을 미룰 수 없다.

기쁨은 그냥 흘러든다. 그리고 흘러나간다.

좇아가 타도 좋고, 머물러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걸 즐겨 보아도 좋다.

하나여도 좋고, 따로여도 좋고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온전히 그대 뜻대로

온갖 의지에 대하여 용서하기를.


그대의 뜻대로.








이전 05화 주인공 되지 마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