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리주의에 딴지 거는 이유
나는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에 반대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내가 아는 한
인류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격을 가진 사람 중 하나이고,
벤담은 공정하고 신실한 사람이다.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진실로 우정을 나누고 싶다.
그렇지만 공리주의에 관한 한
만날 때마다 딴지 걸고
계속 편지를 쓸 것이다,
당신의 결론은 맞지 않다고.
왜냐하면 공리주의는
무엇이 참인가 묻지 않고
어쩌면 좋을까만 묻기 때문이다.
어쩌면 좋을까 묻기를 거듭하면서
무엇을,
왜
하고 묻게 되기에
출발로서 어쩌면은 좋다.
마침으로서도 좋다.
이렇게 출발하면 구체적으로 어찌할지까지 답을 내야 하니까.
그런데
무언가 확정짓고 싶은 욕망은 거꾸로
언제나 정답인 그 선에서 멈추게 한다.
다시 말해
답을 쓰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고
틀리는 수가 무제한하게 더 많지만
답을 쓰지 않은 동안은
가능성은 맞거나 틀리거나로 비등하게 유지된다.
그런데 이 과도기를,
이도 저도 아닌 상태를
기꺼이 정답이라고 우기면?
다시 말해
답을 쓸 흰 종이가 정답이다, 내가 제출하는 건 여기까지~ 이러고 나면
벌어진 일, 결과에 대해서는
언제나 ‘남탓’이지 내 탓은 되지 않는다.
공리주의는
물론 선의에서 출발하지만
타인의 지성을 믿기로 하여
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며
현실적으로 상당한 쓸모를 갖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결국 무엇이 올바른가 묻지도 따지지도 답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많은 논의를 한 것 같고
말한 데까지는 맞는데
끝나지 않고 이어질 자리에서 뚝 끊고는
그것을 오로지 낱낱의 개인에게 묻는다.
이전에 인류는 맞네 그르네 싸웠지만
한 팀이었다.
함께 답을 내야 했고,
나의 답은 너의 답이기도 하고 우리를 위한 것이고 우리의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한 여정에서
첫 번째, 그리고 빈번한 반칙은 누군가 다른 누군가에게 답을 강요하는 것이다.
신분제는 이 강요 자체를 정당화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나 평등의 이상이
이런 강요에 저항하는 건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래서 더는 대화하지 마라는 건
혹은 양쪽 다 만족하면 좋은 거 아니냐는 건
언제나 소외를 일으킨다.
비록 불가능한 질문과 도전이라도 계속 시도하는 것과
안 되니까 하지 말자는 건 아주 다른 태도다.
해 보자는 건 팀을 만들고
그만 하자는 건 팀을 깬다.
물론 저 [[자유론]]의 이야기는 타자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을 이미 첫머리에 하고 있고
길게 차분하게 다음 이야기를 한다.
공리주의자들은 이후에 기나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해야 할 이야기 대신 하고 싶은 이야기만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더는 문제를 얘기하지 말자는 합의만 있다.
물론 답(answer)을 구하려는 노력들이
이런 합의(agreement)를 구하는 노력보다
결실이 적고 부작용이 큰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유한성은 우리가 무한에 접근하는 것, 계속 맞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 방해와 씨름하면서
인간정신은 성장해 왔다.
그리고 인간은 인류로서 만날 이유가 있었다.
사랑하든 미워하든 같이 해야 했다.
그리고 공리주의는 마침내
인류를 ‘합의’ 이혼으로 이끌었다.
편리하고 깔끔하고 기분 좋다.
나도 공리주의 논의, 공리주의의 질문들에 답할 때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즐겁다.
거기에서 부산물처럼 가치를 발견하고 누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건
언제나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문제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안팎을 구분함으로써 얻어내는 거짓 평화를 향하는 동력이 있다.
모든 공리주의자가 같은 마음이란 건 아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려는 곳과 다른 곳을 가리키는
경사로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존중 같지만 방임이고
자유 같지만 고립이 되는 위험.
인간이 자신과 타인의 불완전, 그리고 각기 고유한 불완전을
이 차이를 고려하고 인정함으로써 갖게 되는
뒤섞임과 씨름을
미연에 방지/회피하는 것이
진리를 찾는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진리 찾기를
‘김종욱 찾기’나 ‘고도를 기다리며’와 등치시켜
난해하거나 필요한 일, 구체적인 일 같지만
사실은 텅 빈 기호라고 진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조차 어느 것이 참이라는 주장임을
공리주의는 부정한다. 감춘다.
그들의 전제를 증명하지 않은 채 다음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견해와 접근은 전부를 짚어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그르다고 진단하면서
자신은 전제와 가정 자체를 진단 생략하고
그 전제라면 그렇다,라는 결론만을 바라보게 이끈다.
‘왜’라고 묻지 않으면
언제든 얻을 수 있는 쾌거, 편리함이다.
그리고는 ‘어떡할래?’
말을 입혀서, ‘뭐할래?’ 하고 묻는다.
어쩔 수 있는 ‘무엇’이 보이지 않으면
다 가짜라고, 허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방법론이 허상이다.
그건 마치
만일 빛보다 빠른 에테르가 있다면
에테르로 가게 만든 비행기 중 싸고 빠른 걸 탈래, 느리고 비싼 걸 탈래?
하고 묻고는
나오는 답을 듣고는
거 봐, 그러니까
얘는 저 비행기 타러 동쪽으로 가는 거야, 냅둬.
이렇게 말하는 셈이라면 너무 지나친가?
캐리커처.
슥슥 그리면 그렇다는 거다.
진짜로 그렇게 생겼단 건 아니다.
그러나 각자의 지력과 처지, 편향을 무시하고
마치 그냥 두면 되고,
각자의 차이를 무시하고
오직 상황에 의해서만
다양한 도덕적 해결값을 구하려는 시도는
실은 개인을 동등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
개개인의 차이를 무시하여
이미 작동하는 차별과 격차를 더 키우는 효과를 낸다.
공리주의는
아무리 그게 좋아도, 깔끔해도
잠시 이익을 발생시킨대도
경계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할 ‘임시방편’일 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왜’를 묻고
답을 시도해야 한다.
무수한 오답과 착오, 실수와 갈등을
감내해야 한다.
한 팀이 되어야지
팀을 깨면 안 된다.
우리는 언제나 외부를 갖고
그 외부와 전면적으로 맞댈 수 있다.
그때에 우리끼리의 다툼과 갈라짐이 더 크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은 싸우면서도
정 붙이고
달라도 같이 가야 한다.
다름을 인정한다면서
결코 같이 가지 않는 방식이
정말 함께 하는 것일 수 없고
공동이 수행할 수 있는 것일 수 없다.
그러니까
마주칠 때마다 툭툭
이봐, 존,
이봐, 제러미 하며
딴지를 걸 거다.
그들의 지성은 분명 더 나아갈 수 있었다.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그들은 가다가 말고
대답하지 않는 게
대답하는 것보다 좋다고 믿어 버린 거지?
아무튼 나는
한 팀이 되자는 쪽을
팀을 깨자는 쪽보다 신뢰한다.
의도와 판단, 행동 모두에서.
나는 존경하는 당신에게 반대합니다. 당신이 다음 걸음을 뗄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