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윤리의 출발을 알림
김혜진 작가의 근작 [[축복을 비는 마음]]은
집을 주제 또는 소재로 한 단편들을 모았다.
통상 표제작을 처음이나 두 번째로 싣는 데 비해
이 소설집은 표제작를 맨 나중에 싣고 있다.
이 선택 혹은 상태는 독자의
독서에 일정한 흐름을 제공한다.
TV 시리즈 <응답라라…>로 대변할 수 있을
공동체의 윤리는 더는 무효하다.
그것이 아름다워도, 설령 원하더라도
추억 속에 꽂혀
박제된 채, 그래서 오염되지 않고 순결하게
회상하고 복기할 수 있을 뿐이다.
물어야 하는 건 왜 더는
덕선이나 쓰레기를 볼 수 없는가가 아니라
왜 더는 그렇게 ‘할 수 없는가’이다.
즉, 무슨 조건의 변화가 옛것을, 좋았던 것을 작동 정지시켰고 재가동할 수 없게 하였는가.
그러므로 지금 작동 가능하고 필요한 선은 무엇인가를
차례로 또한 맞물려 물어야만 한다.
향수에 젖는 건 어떻게든 둥지를 가진 자의 것이며
맨 가지에서 비를 맞으며도 사색하는 건 가상하나
자기 아닌 타인에게 요구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전의 공동체 윤리란 곧 ‘나의 윤리’다.
세계가 조건지어졌고 그 조건을 지속한다는 가정 위에서 예측 가능하고 정해진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 최고의 비난은 “본데 없다” “본데 없이 컸다“가 된다.
그러나 지금, 누가 무엇을 예측할 수 있는가.
다같이 가난하던 골목은 아름답게 추억되지만
유례없이 커다란 양극화와 불평등의 세월을 뜨겁게 내달린 후
아파트 평수로 계급을 지우는 걸 넘어
“개근거지”라는 말마저 횡행하는 때에,
남과 여, 노와 소. 이전에 남녀노소로 묶이던 단순한 단위마저 (그리고 가족도) 뿔뿔이 흩어져 서로 칼날을 겨누고 (이윽고 휘둘러) 아우성치는 시대에, …
“이 가난한 시대에 시인이란 무엇인가?”(횔덜린, <빵과 포도주> 중 일구)란 물음은
이 가난한 시대에 어떤 윤리 즉, 행동 준칙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으로 전진한다.
마법 같은 해결은 없지만
마법이 아니어도 마법 같은
내 몸과 마음을 정향하는 원칙, 공유할 수 있고 기대해도 좋은 원칙은 무엇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
[[축복을 비는 마음]]은 [미애]에서 출발해
현실적이어서 초현실적으로도 읽히는 [20세기 아이]와 [목화맨션], [이남터미널] [산무동 320-1번지],
[자전거와 세계] 들을 경유해
다소 소홀히 읽을 수도 있는
[사랑하는 미래]를 거쳐서
마침내 [축복을 비는 마음]을 불러낸다.
그건 성인이거나 군자 같은 게 아니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하루의 노동을 멈추면 당장 하루의 삶이 불안정해지는 이들이,
물신을 섬기는 게 아니라
진짜 물신주의자들 덕분에 위협받는 이들이
그런 채로도 행할 수 있는
자유롭고 오롯한 권능의 영역이다.
이제 신은
베들레헴 한 마구간에 유난히 거룩한 부모 아래
‘선택된 자’로 오지 않고
아무런 선택을 받지 않은 자들로 현신한다.
거기에 거룩함은 없다, 비참함이 있지만.
작가와 작품이 상대적으로 더 가진 자의 마음도 들여다 봐 줄 때 그것은
가지지 못한 자에게 함구를 요구하거나
둘의 고통(그러므로 비명)을 동등하게 두거나
혹은 그럼으로써 아무런 해결 없이 정신승리, 진짜로든 가짜로든 정신 승리하라는 정언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이제 조물주 위의 건물주에서 내려와
사람이 된 — 그러므로 다같이 비참함을 드러낸
유산자와
무산자가 나란히
마주 이야기할 한 자리를 마련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둘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아니면 서로 머리채를 잡든지)
우리가 생존에게 승리를, 존엄에 패배를 안긴
숱한 행동과 조건 들을 톺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도.
또한 우리 인식이 최고조로 고양된대도
삶의 현실은 좀체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최소한의 존엄, 사람됨은 무엇인가 묻게 할 것이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어떤 자원도 없이 빈털터리로 시행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김혜진 작가가 우리 손을 끌고 다다른 지점은
더 알려고 하지도(계몽적 이성의 한계를 수용하라)
더 어떤 ‘내가 어떠해야 함’을 가리키는 윤리 다발도 펼치지 않고(종교와 관습의 한계도 인정하라)
전혀 다른 영성, 너와 나를 잇는 다른 방식을
그러나 거짓 아니고 진짜여야 하는 방식을 요구하고, 제시해 보인다.
너도 사정이 있겠지, 그렇다고 그게 맞다거나
그래야 한다든지 그러라는 건 아니지만,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걸로 둘게, 그러나 아무튼 나는
너를-축복한다.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네가 받기를.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고
타자의 처지를 ‘생각’[praktikos, practice]하였으므로
‘너’를 출발점 삼아
나의 윤리, 그러므로 서로 “너는 이래야 해”라고 지시하고 판단, 비난 할 수 있는 동일성의 윤리 대신
너의 윤리, “너는 그렇구나, 그런 채로 너를 축복해”라고 하는 인정, 존중, 기원하는 다양성의 윤리를,
미리 정할 수 없고 경청하여 매번 새롭게 응답하는 윤리를
획득할 것이다, 혹은 획득하기를 바란다.
이 아름다운 책 속 문장들은 한데 어울려 우리를 불편케 하고
우리가 서로, 독자와 독자 들이 서로 삶의 처지에 대한 이해, 구체성을 얻지 못했고 요구할 수도 없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한편
이 처절하고 비참한 상태가
우리의 조건이란 것, 우리가 양쪽 모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어쩌면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고 다시 느끼고 바꾸어 설정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럴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선사해 준다.
가벼운 이야기가 무거워지고
다시 가벼워진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육 초의 심호흡과
축복을 비는 마음일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서로를 책망할 수 있는 건
다른 사람은?
너는 왜 (타자의 고통에) 무관심해,
너는 왜 응답하지 않아?
가 될 것이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