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가 주는 것
지난 1958년 충남 강경여고 RCY 단원인 학생들이 봉사활동으로
현직 선생님과 함께 병중에 계시거나 퇴직하신 선생님들을 위문했다고 해요.
1963년 그걸 의미 있다고 여긴 청소년 적십자(Red Cross Youth) 충남협의회는
9월 21일을 충청남도내 ‘은사의 날’로 정하였고요.
이를 본보기 삼아 전국적으로 5월 24일을 은사의 날로 정해 기념하잔 합의가 나왔대요.
이듬해 1964년 5월에 ‘은사의 날’을 ‘스승의 날’로 고쳐 부르자고 하였답니다.
그 이듬해 1965년에는 세종대왕 탄신일 5월 15일로 일자를 변경하였지요.
스승의 날은 이후 박정희 정권이 모든 교육관련 기념행사를 국민교육헌장선포일로 통합한
1973년 3월 이후 어정쩡하고 소홀하게 다루어지다가
1982년에 다시 부활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다른 이유로 어정쩡해졌습니다.
자발적으로, 학생 편에서 시작한 기념은
자신들의 배움을 자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그 배움이 고립된 것이 아니라 큰 줄기를 가지고 이어져 온다는 인식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즉, 감사에서 태어나 사랑으로 피어난 것입니다.
그런 감사와 사랑을 독재자가 찍어 눌러 평면화하였던 시절이 있고,
부활했다가도 점점 생명력을 잃고 형식화 즉, 마음을 잃고 껍데기만 남아 갔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정도가 아니지요. 촌지며 폭행, 성추행, 비민주적 교실 운영 등으로 파훼된 관계는
김영란법이라고 불리는 법이 간여하는 영역으로까지 추락하였습니다.
법이 최소한의 윤리라고 할 때, 그 최소한이 작동해야 할 만큼 추락한 것입니다.
교사의 타락? 사제관계의 타락일 것입니다. 손뼉은 한 손바닥으로는 칠 수 없으니까요.
이걸 독재에 의한 제한 대척점에 두며 민주에 의한 제한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닙니다. 민주는 해방의 원리입니다.
불편을 감내하더라도 한 명 한 명이 더 깨어나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자기 관계를 주도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민(民)이 주(主)가 되는 것이라면요.
선택권을 빼앗아 간 것은 이 지경까지 타락시킨 원리도
거기에 묶어 가두어 버린 원리도 같습니다.
자본주의, 배금주의의 현 시점 최종진화형.
모든 것을 그렇게만 돌려 생각하고, 그렇게만 움직이노라면
실제로 모든 게 그런 일이 되어 버립니다.
저는 스승의 날에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배움에 감사하고, 배움이 기쁘고, 배움으로 성숙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선택하는, 발견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우리 세계를 그대들이 바라는 대로 바꾸어 가기를 바랍니다.
나를 찾지 마세요.
나는 없어요.
나는 매순간 만드는 것이예요.
그냥 인간이란 생명체가 그렇습니다.
그 원리를 탐구하는 것과 별개로
사실은 사실로서 이렇게 놓여 있습니다.
인간이성은 그동안 충분히 이를 조명하였습니다.
영혼은, 모르겠습니다.
자아를 조망하는 영혼은 정체가 무얼까요? 아무렇거나
우리의 ‘생활정신’은
매순간 자신을 새롭힙니다.
매번 다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하이데거가 일컬은 현존재(Da・sein)는
오직 현재함으로써만 참입니다.
그대는 성장하는 것이 기쁩니까?
자신이 자라나는 것을 느낍니까?
어떻게 뻗고 자라나서
어떤 모양으로 살아나고 싶습니까?
그대로 하십시오.
그럴 수 있게 도운 모두를 마음속에 스승으로 모십시오.
감사는 사랑을, 사랑은 유일하게 안으로부터 힘을 주니까요.
나무에게 바람이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