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는 대로 — 황금률(마태오복음 7장 12절)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여러분을 위해 해 주기 바라는 것을 그대로 그들에게 해 주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자들의 정신입니다.”
예수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여기에 대해 황금률(黃金律, the golden rule)이라고 흔히 부릅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저 말마디를 무척 만족스럽게 여기거나
불만족스럽지만 반박할 수 없었거나
하여튼 받아들인 겁니다.
그런 다음 높은 데로 들어올려 두었습니다.
이 원칙은 일종의 신처럼,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교 신앙 여부와 무관하게라도 사회문화 속에서
어떤 정의로서 취급되는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저는 신자입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게 지성이 마비된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반성하고 성찰하기를 그친다는 뜻도 아니고요.
그래서 이 말마디도 생각해 보자구요.
황금률이라는 격찬은 ‘남의 생각’이잖아요?
제가 생각한 건 단순합니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무언가 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면.
더 바라지 않는 상태가
무언가를 바라는 상태보다
더 충만한 상태일 것이기에
내가 점점 나아질수록
내가 점점 나은 사람이 될수록
내 인생이 더 나아질수록
나는 점점 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텐데
그러다가 내가 무엇도 바라지 않는 상태가 된다면?
그러면 나는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야 하는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렇게도 생각해 보세요.
나에게 갓 찾아내고 확인한 다빈치의 숨겨졌던 진품,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구세주 이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이 맡겨진다면
내가 거기에 일점일획을 보태고
아주 조금 깍거나 덧붙이는 것이 무슨 짓인지.
그러니까 내가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신뢰한다면,
귀하게 여긴다면
나는 감히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것을 소중히 그냥 두지 않을까.
만일 너무나 귀한 문서가 있고,
이 문서를 보존하기 위해 아주 작은 빛도 볕도 들이지 않아야 한다면
나는 그 책을 펼쳐서 한순간 보고나서 그것이 부스러지거나 변하는 걸 바랄 것인가
그렇지 않고 아예 보지 않고, 다가가지 않는 것을 택할 것인가.
보통의 이웃이라고 해도
나의 욕망을 상대에게 투사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연인 사이든 부모와 자식 사이든 친구 사이든
고객과 기업 사이든
이 나라와 저 나라 사이든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든
교사와 학생 사이든
역무원과 승객 사이든
우리가 무얼 떠올리든
내가 바라는 걸 상대에게 해 준다는 건 어딘가 이상하지 않나요?
그것을 기계적으로 일치시키는 게 과연 황금률의 지위를 누리는 그 내용,
진짜일까요?
나는 그대가
욕망에 응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대는 상대에게 응답해야 합니다.
마치 상대가 그대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대도 상대에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는 것은 생명을 더하고
존엄을 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를 존재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존재를 변경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상대가 진짜라면
황금률로 대해야 할 만큼 진짜라면
어떤 변경도 훼손입니다.
우리는 그의 존재가 영위되는 데 필요한 걸 발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욕망에 응답하지 않고
필요에 응답해야 합니다.
욕망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비난받든 원망을 듣든 어떤 억울한 누명을 쓸지라도
그대의 욕망이 아닌 것을 그대의 욕망처럼 받지 마십시오.
그의 욕망이 아닌 것을 그의 욕망인 것처럼 들씌우지 마십시오.
필요에 응답하십시오. 다만 필요에.
그 필요성 앞에는 다른 법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요를 위해 그대는
한편 현명하여야 하고,
한편 물어야 합니다. 묻고 들어야 합니다.
황금률은 ‘잘해주라’는 게 아니라
‘잘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깊이 오래 들어야 할까요.
얼마나 거슬러 올라가야 샘에 다다를까요.
어디에 닿고 다다라야
고요해질까요.
아무럴 것도 없어질까요.
내가 원하는 것이 내게, 너에게 정말로 좋은 것일까요.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