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칼을 줄게

질문 (2) 무엇을 물을까

by 이제월

멈추고―보고—묻는 순서를 이야기했습니다.

묻기의 처음은 ‘왜’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고요.


그럼 무엇을 물을까요?

‘왜’ 다음은 ‘무엇’입니다.

무엇을 물을까 묻자면

묻는다는 게 무엇일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난번 질문을 ‘왜’ 하는가 이야기하면서

묻는다는 건 상대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상대의 권리를 인정하는 행위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묻는다면

묻기는 상대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묻는 자는 물음받는 자를 향하여

자신을 낮춥니다.

질문은 나를 낮추는 행위입니다.

상대방을 높이되

부당하게나 불확실한 채로 뭐든 던져 보듯 아무렇게나 높이는 것이 아니라

과하지 않게, 완전하게 책임질 수 있는 형태로

즉, 오직 나를 낮출 뿐,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이 나와의 관계성에서만큼은

상대가 높아지도록 예우하는 것입니다.

왜냐.

묻는다는 건 상대방의 ‘답’을 기다리는 행위이며,

마침표를 찍는 것, 무언가 결정하는 것이

나 아닌 너에게 있도록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둘 사이에서 내가 아래에 서는 것입니다.

묻는 자는 스스로 아래에 섬으로써

흐르는 물을 받아

하류가 상류보다 거대하고, 바다가 온통 ‘하나’로서 가장 큰 것처럼

지혜롭게 배웁니다.


본래 더 어리석은 자가 배우는 게 아니라

더 지혜로운 자가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이득을 얻기 위해 낮은 시늉을 하는 자가 가질 수 없고

진심으로 낮아져 자신을 낮춰 보고, 그러나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고

오직 매순간 자신을 낮추어 상대로부터 배우려는 이만이 진짜로 쥘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지혜가 그런 자에게 머물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머물지 않습니다.

물이 막힌 그릇에 담기는지 구멍이 숭숭 뚫린 체에 담기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설령 체라 해도 맺힐 만큼은 맺히지만.


낮추는 행위로서의 질문은 더불어

상대방을 초대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나의 지혜, 나의 배움이

상대가 서서 자신을 마음껏 펼치는 마당인 것입니다.

상대를 위한 잔치를 벌이는 것, 그것이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인격적 존재만을 향하지 않습니다.

비인격적 존재라 하더라도 물음을 던져 받고, 그것을 받음으로써

답을 발산합니다.

물론 그들의 대답은 말로 듣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래서 다시금, 멈추어 서서 오래도록 보아야 합니다. 보며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함이 봄이고, 봄이 곧 생각이 되어 갑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묻는가.

어떤 형태로 무엇에 대해 묻든지

물음은 상대를 초대하는 행위,

나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건 청유요,

내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데 동의하고 수행하기를 권하는 건 권유입니다.

물음은 다릅니다.

참된 물음은 어떤 형식으로 어떤 질료를 담든, 언제나 이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에게 당신을 보여 주세요.>

<나는 듣겠습니다.>


그대는 초대하고,

환영하고,

낮추어 경청합니까?


이것은 대화의 기술이 아니라

생각의 기술입니다.

이렇게 출발하지 않은 기술은

오로지 자신에게 기울어 우리를 오류에 빠트립니다.


그대는 바르게 생각하여

훨훨 사십시오.

살게 하십시오. Do ani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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