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대지

저마다 자기네 언어로 듣고 있다

by 이제월



“지금 말을 하는 저 사람들은 보아하니 모두 갈릴리야 사람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저마다 태어난 고장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셈인가?

바르티아인과 메대인과 엘람인, 메소포타미아 주민, 유대와 가빠도기아 주민,

본도와 아시아 주민, 프리기아와 밤필리아 주민,

에집트인과 키레네 주변 리비아 여러 지방 주민, 로마의 거류자,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 들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에 대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네 언어로 듣고 있다니!”

― 사도행전 2장 7-11절



이어지는 구절


모두들 넋을 잃고 어쩔 줄을 몰라 “이 일이 무슨 뜻일까?” 하며 서로 물었다.

그러나 더러는 “새 포도주에 흠뻑 취했군” 하며 빈정거렸다.

― 사도행전 2장 12-13절



이 이야기는 오순절에 벌어진 ‘성령강림’의 한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가 부활하고 승천한 다음, 위로자와 협력자를 보내 주겠다고 하였는데

과연 제자들은 스승이 부활한 것을 마주한 뒤로도 군중을 두려워하고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하며 골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 같은 혀”(사도행전 2장 3절)들이 그들 각자에게 내려온 다음

갑작스레 온 세상에 나가 외치고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재미난 건 그때 그들이 하는 말을 각 사람들은 자기네 모어(母語, mother tongue)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속 바벨탑 이야기를 떠올린다면

하느님이 옛적에 한 일을 돌이켜 ‘분열’시켰던 이들을 다시 ‘일치’시키려는 장면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단락을 접할 때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네 언어로 듣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지 않나,

왜 저들은 이를 가리켜 “이 일이 무슨 뜻일까!” 하며 어리둥절해하지?

더 웃긴 건 어째 이 모든 일을 목도하며 “흠뻑 취했군”이라며 빈정거리는 거지?


첫 번째 이질감.

모어를 쓰는 동일 문화권 안의 사람들조차 가장 기초적인 어휘에 대해서도

결코 같은 뜻으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별로’라는 말을 저마다 얼마나 다르게 알아들을까요?

‘괜찮다’는 말은 얼마나 무제한으로 의미가 갈라지고 뻗어나가는지요?

‘잘났다’는 말도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상반된 의미를 가리키는 데 아무 제한 없이 쓰이고 있고, 이런 줄 알지만 막상 당면해서는 이 뜻일까, 저 뜻일까 확신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사랑한다’는 말이 사람사람마다 얼마나 다르게 쓰이고, 다른 걸 뜻하고, 다른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사도행전의 기록은 “태어난 고장의 말”이라고 의미를 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세요. 이곳은, 이 한 곳은, 정말로 한 곳인가요?

저마다의 장소이고, 저마다의 전혀 다른 가치와 색채를 지닌 곳이고, 전혀 다른 것들을 요구하고 요구받는 곳이지 않나요?

그래서 사실은 이미 우리는 각자 말하고 각자 듣는데

익숙한 음운과 발성, 어문 구조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유사성을 규정하고

‘알아들었다’고, 마치 늘 잘 소통했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저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아무튼, 소통 불가의 상황에 처해서, 또는 소통이 된다는 ‘낯선’ 상황에 대해서

이 복잡성의 세계에서 우리-중 대부분-은 알아듣기 위한 무한정한 노력을 합니다.


그저 그러할 뿐 (自自然)

뜻을 갖지 않는데 (不具意)


한쪽에서는 “이게 무슨 뜻일까” 어리둥절해합니다.


다른 한쪽은 그런데

“취했군” 이라며 빈정대기나 합니다.


두 번째 이질감은 이 두 번째 반응에 맞닥뜨려서입니다.

이해불가한 것에 대해 탐구하거나 경외를 느끼는 사람들을 나는 존중합니다.

그들이 줄기차게 실패해도, 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처량한 실력을 지녔더라도

나는 이 <불가능한 희망을 품는 이들>에 대해서 경외감을 갖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상황에 영향을 받지만, 상황에 의해 규정되거나 포섭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이 나름의 뜻을 지닌, 지닐 수 있는 독립된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독립된 자들은 연결을 시도하고 탐색합니다.


그런데 “취했군” 하고 빈정대는 이들은, 우리의 일상에서 매일 마주치거니와,

이해불가한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절망하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무엇’이요, ‘어떠함’이라고 단정합니다 (차단합니다, define).

그러니까 그들은 <게으른 거짓말쟁이>이며,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훼방꾼>입니다.

<가능한 절망을 퍼뜨리는 이들>인 것입니다.

나는 이들에 대해서 역겨움을 느낍니다.

그들을 혐오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균을 품은 사람에게서 썩은내를 맡는 것처럼

그들을 애정할 때에도 어쩔 수 없이 역겨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염병에 걸려서는 자신은 깨끗하다고 주장하고

곳곳에 감염시키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끝내 실패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 다음 이야기로 이어질지, 어느 쪽이 이 이야기의 본류(本流)가 될지는

적어도

나 아닌 다른 이는, 우리 아닌 다음 등장인물들은

답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살려 두고 물려주는 사람들입니다.

희망을 품는 사람이 존중받을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당신의 절망조차

희망이라는 대지 위에서만 펼쳐지는 것이니까요.

절망해버렸다면

절망조차 시작할 수 없습니다.


기껏 “취했군”이라고, “새 포도주” 탓을 하고 환원(還元, reduction)하지 않기를.

환원은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과정’ 없이, 절차 없이, 그럼으로써 ‘가설’이 아닌 진리처럼, 믿을 교리로

자신이 환원한 걸 내뱉지 않기를.


나 또한 그러기를 바랍니다.


나는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경험하지 않았거나 증명하지 못할 때라도

자명(自明, trivial, self-evident)한 것을

무엇의 간섭도 받지 않는 그저 그러한 것, 자기 자신인 것으로 보지 못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않기를.



작가의 이전글예람이에게 | 칼을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