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칼을 줄게

질문 (3) 어떻게 할까

by 이제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라고 말하지 않는 자는

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편 15의 구절입니다.*


원문은 子曰: 「不曰 『如之何, 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이고,

자왈: 「불왈 『여지하, 여지하』자, 오말여지하야이의.」라고 읽습니다.


우린 두 주 동안 ‘질문’에 대해

‘왜’와 ‘무엇’을 묻고 답했습니다.


이제 질문을 실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해 보아요.


거꾸로 답부터 말하자면,

예전에 만화책에서 본 표현이지만,

그 완료된 어감이 좋아서,

이미 이루어진 것이란, 확신의 어감을 좇아 빌려 쓰자면,


‘통한 진심’(通한 盡心/眞心).


통한 진심이 소통의 강을 건널 배입니다.

그대가 의지하고, 올라 탈

잘 다룬다면 이제는 즐기고 기뻐할 그 배의 이름은

진심입니다.


진심은 언제나 ‘통할’ 진심이어선 안 되고

— 달리 말해, 결과에 대한 기대로 상대를 조작하듯 접근하여서는 아니 되고 —

‘통한’ 진심이어야 합니다.

즉, 믿기 때문에

다가오는 결과에 상관하지 않고

다 내어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물론 가벼운 일은 가벼운 정도로 족하고

일이 클수록 더 무거워집니다.

더 많은 것들을, 더 강하게 전하겠지요.

그러나 가장 강한 때조차

상대를 조금도 압박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건드려 밀고 들어가지 않고

상대의 마음만을, 정신만을 일깨웁니다.

주의를 끌지만

주의해 주기를 바라지만

그 눈길을 강제하거나

앞을 어지럽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질문은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주입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질문은, 묻는다는 행위는

왜와 무엇에 대한 설명에 이어서

상대와 인격적으로 관계 맺으려는 시도입니다.

무정물(無情物)에 대해서조차 유정(有情)하다는 듯 대하는 것,

물론 착각하라는 말은 아니고,

다름을 인식하더라도

살아 있는 관계성을 의식하고 탐색하고 발견하고,

때로는 함께 관계해 재구성하라는 것입니다.


질문은 그래야 합니다.

상대의 관심을 끌고,

그것이 속임수가 아니려면

그렇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물음은 앞서

‘경청’을 전제합니다. 경청 후에 물음입니다.

그리고 물음 뒤에도 다시 경청입니다.


이것이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이어질 때

차츰 상대는 그 진심을 알게 됩니다.

사물조차 그 신비를 열어 보이고

신도 이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도 궤를 같이하는 말입니다.


이 ‘진심’이라는 말은

眞心으로는 진짜 바라는, 실제의 마음이라는 것이고,

盡心으로는 ‘마음을 다한다’ ‘다할 때까지 남김없이 송두리째 쏟뜨리는 마음’이라는 것인데

맹자는 후자를 택해 썼습니다. 오랜동안 우리에게 진심이란 盡心이었다 압니다.


眞心을 盡心하여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 通하려는 진심은

길을 찾습니다.

‘사랑은 길은 찾는다’고 한다면

모든 진심은 사랑을 몸입는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형태의 육화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다른 형태로 마음을 몸입히려면

캄브리아기 대폭발처럼

부적절한 형태로서 곧 멸종한 무수한 종들처럼

잠깐 되는 듯 싶다가도 곧 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진심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말 같지만

유일하게 정확한 지칭입니다.


그래도 이 진심의 얼개를 들추어 헤아려본다면,

스스로 ‘왜’를 묻고

상대에게 정확하게 ‘무엇’을 요청하고

그리고 우리가 무얼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가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신뢰를 드러내며

묻고, 기다립니다.


더 단순화하자면

이유를 분명하게 두고서

의도를 확정하여, 또는 의도의 흔들리는 ‘범위’를 임시로라도 ‘지정’하여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유를 그대로 혹은 마땅하게 변용하여 ‘목적’을 전해야 합니다.

사실 여기서 이유와 의도와 목적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그렇지만 또 분명 다르게 부르는 만큼 다른 위상이 있기 때문에

아울러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에 대해 더 상세한 이야기가 필요한가요?

묻는다면 답하겠습니다.








*김도련 역주본을 따름.

**송(宋)나라 사람 호인(胡寅)이 쓴 《치당독서관견(致堂讀書管見)》에서 나오는 구절인데,

그 의미의 기원을 『맹자』의 ‘수신사명(修身俟命)'에서 찾기도 합니다.

아마 『삼국지 연의』에 그 표현이 등장하던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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