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시와 현실

허락된 것(나희덕 시 「허락된 과식」으로부터)

by 이제월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햇빛이 가득한 건

근래 보기 드문 일


오랜 허기를 채우려고

맨발 몇이

봄날 오후 산자락에 누워 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연초록 잎들이 그렇게 하듯이

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

허천난 듯 먹고 마셔댔지만


그래도 남아도는 열두 광주리의 햇빛!




― 나희덕 시, 「허락된 과식」 전문



시인의 시어는

일상의 의미를 그대로 가져다 쓰지만

우리는 덕분에 전에는 갖지 못한 전망을,

전에는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 의미를

발견하고, 누리고, 거기에 소속됩니다.


시어가 일반의 언어와 다른 건 이 점 때문입니다.

시는 창조이거니와

소설이 창조하는 것과 다르게

스스로 맥락을 창조하는 기원, 샘이 됩니다.


시는 언어의 샘입니다.

언어의 샘은 의미가 지나오는 통로입니다.

의미가 몸(soma)을 입어 육화(肉化, incarnation, ensarkos)합니다.

순수추상이 살덩이(sarx)가 되는 겁니다.

그런 뜻에서 모든 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육화한 말씀, 말씀이 살이 된 것, 로고스 엔사르코스(logos ensarkos)

그저 몸이 아니라 살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감각하게 합니다.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각하게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못할 때에도 감각할 수 있는 까닭은 단순합니다.

그것이 실제로 우리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설명하여 머릿속에 형태를 띠는 것, 그렇게 ‘소마’를 갖게 하는 것을 넘어서

그 있음을 감각하게 하는, 내게 아무런 능력이 없더라도

마주치게 하고 함께-있게 하는 것, 그것이 ‘사르크스’의의 힘이며

‘존재는 작용한다’는 형이상학의 제일법칙입니다.

‘있음’은 ‘함’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수용할 수 있다면 — 수용한다, 는 도식이 성립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는 그냥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이야기가 실제로 우리 정신이 마주치는 정신계, 사상계의 실재요,

‘단위’가 되는 겁니다. 양자(量子, quantum).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에너지의 최소량의 단위’로서, 어떤 것의 의미, 정신적 실재가 드러나는, ‘관계-할-수-있는’ 최소한의 쪼갤 수 없는 단위로서의 ‘것’, 의미의 단위를 창조하는 게 시입니다.


필멸하는 인간이 만드는 불멸하는 것

물론 조건부이지만, 정신은 애초 ‘매개된 직접성’으로 자신을 전개하니까

어쩌면 참 어울립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만날 수 있는 자가 있는 한 불멸하는, 전에 없었으나 이제부터 영원한 것을 낳을 수 있으니, 그게 바로 시, 입니다.


그리하여 시인이

‘허락된 과식’을 노래하고서

우리는 정말로

이 과식을 허락받습니다.


마침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잠깐의 햇빛을 맞을 수 있고

햇빛을 받을 때마다

이 넘치지 않는 무한한 양식을

한껏 드십시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먹음직스러운 햇빛을 든든히 먹고

우리네 모든 존재에 새겨진

오랜 허기’를 채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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