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물길

누가 빛을 되찾았는가[광복(光復)]

by 이제월


광복에 대해 얘기하자면 며칠 밤을 샌대도 모자라요. 간단치도 않고 짧지도 않은 이야기.

광복을 목적어 삼아 주어의 자리에 서려는 이들이 많고 그들은 때로 탈인격적이기도 하답니다. 단순한 주관이나 이해관계가 아니라 세계관과 사고회로, 역사적 실존의 긴 맥락이 중첩되어 형성되고 꿈틀거리는 게 많답니다. 그런 입장들 중에는 대한의 광복에, 한반도가 빛을 되찾은 데 독립운동가의 기여가 보잘것없다거나 아예,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에 단호히 반대합니다.


일단 광복을 명사로 묶어두는 사고에 반대합니다. 잘못 보는 겁니다. 물건이 아니라 사건이니까요. 혹은 사태. 옮기거나 구속하거나 소유 또는 이양 가능하게 귀속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광복은 어떤 것, 활동-함,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누가 소유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행위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역사로서는 누가 하‘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친일파가 광복했나요? 천황 만세를 외치던 이들이? 신사 참배를 독려한 이들이? 영국이나 미국, 소련 같은 승전국이? 아닙니다. 그들이 전쟁에서 이길 수야 있지만, 패전국의 무장을 해제할 수 있지만 ‘빛을 되찾을’ 순 없습니다. 빛을 되찾는 건 첫째, ‘빛을 잃은 자’라야 할 수 있고, 둘째, ‘빛을 찾는 자’라야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을 갖는다는 건 ‘잃은 채로’를 ’아직 찾지 못한 채로‘로 읽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읽어내는 자만이 빛을 되찾는 것입니다.

정치외교상으로도 포츠담 회담 등 미구에 닥칠 종전에서 미래의 확실시되는 승전국들이 전후 처리를 논의할 때, ‘독립 보장’을 운위할 수 있던 것은, 회담 석상에 다루어질 수 있던 것은 대한민국 하나뿐이었습니다. 독립의 뜻과 마땅함을 이렇게 뚜렷이 떨쳐 드러낸 이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과 비교나마 할 수 있는 이들이 달리 없었던 것입니다.

강제를 가하는 권력이 있고, 강권하고 유도하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차례로 군사력과 경제력이 그런 일을 하는 자리에 놓이지요. 그런데 설득력도 있습니다. 누구도 의지에 반하여 설득되지 않음을 생각하매 진정한 설득력은 논리로 이기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사는 일입니다. 기꺼이 동의하는 것, 같아짐과 같이함이 굴욕이나 상실이 아니라 기쁨이고 우정인 것입니다.

광복은 정치적 사건에 머물지 않고 뜻의 일이며 마음의 일, 약자의 문화가 강자를 교화한 일입니다. 그러니 광복은 사해동포의 올바른 마음과 손손을 모아내 같이 이룬 일이나 먼저 시작이요 마침, 전부로서 저 우국지사들의 언행일치하고 광명정대한 행적, 이루기까지 그치지 않았을 유산이 있어 이룬 것입니다.

광복은 누구의 것인가. 나라와 겨레를 사랑한 자들의 것이요, 사랑받는 나라와 겨레, 역사와 삶과 생각의 공동체의 것입니다. 잘잘못이나 잘남 못남이 아니라 오직 그 마음에 들어오느냐 나가느냐로 주인과 외인이 갈립니다.

손님, 들어와 한 가족합시다. 싫더라도 저주하거나 폄훼는 마시오.


올해가 광복 80주년입니다.

기억할 것을 기억하고, 잊을 것은 흘려보냅시다.

그러나 바로 생각하고 바로 알아야 나머지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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