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칼을 줄게

주인의 자리에 서기. 홍익인간 재세이화?

by 이제월



오늘은 개천절(開天節)입니다. 하늘이 열린 날인데,

말하자면 건국절(建國節)이지요.


국권을 되찾은 8월 15일은 광복이고,

환인의 아들 환웅이 신단수로 내려와 신시를 건설하고

그와 웅녀 사이에 태어난 아들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해 세운 나라가 조선(朝鮮, 아침에 처음 볕이 드는 곳 또는 그 첫 빛, 아시밝)이니, — 이는 도읍 아사달의 훈치(訓置)라고도 합니다 — 이 날을 기리는 10월 3일이 건국이지요.

겨레의 맥을 거기서 잡을 때, 비록 여러 왕조가 들어서고 강역이 변천하지만

하나의 시스템이 흥망하고 성쇠해도 시스템의 주체들, 백성들은 늘 같았으니

이들이 유라시아 곳곳에 흩어져 온 칸국/한국/간국(마립간, 칭키스칸, 킵차크한국, …등을 떠올리면 됩니다. 칸과 한과 간은 모두 같은 말의 여러 표기입니다) 중 이곳 남만주로부터 삼한 땅에 이르도록 대한을 이어온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현대국가의 이미지는 아니지만,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해 국호를 지은 날로부터 오천년을 바라는 긴 세월 대한을 이루어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국조(國祖) 단군을 기리는 대종교가 힘없는 까닭은 한국인들의 마음에서 일찍이 멀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국난의 시기에 대종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단결시키는 구심점 중 하나로 기능했으나, 1926년 일본의 압력으로 도본사(道本社)가 해체당하고 포교 금지령을 받았으며, 서울 남도본사도 폐쇄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민족주의 계열의 종교들은 정치적 탄압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대종교 측 사료에 따르면, 1942년 11월 19일에 윤세복 교주를 비롯한 25명 간부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 중 10명은 고문 또는 옥살이로 사망하거나 옥사했다고 전해지며, 이 사건을 대종교 측에서는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 부르며, 숨진 간부들을 ‘임오십현’으로 추숭하고 있습니다.

김좌진, 서일, 신채호, 안창호 등 숱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고, 청산리전투에도 많은 교도들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비공식 자료를 포함한 연구자들은 많게는 대종교인의 절반 이상이 직접 독립운동에 나섰고(60~70%에 달한다고 보기도 함), 이런 투쟁의 결과 교세가 많이 위축됐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다시피 많은 지식인들이 일제에 투항하고 일본제국의 통치에 협력했습니다(현대의 일본을 일본제국과 동일시하지는 않기 바랍니다). 그들 중 적지않은 수가 강제노동과 징병, 심지어 여인들, 소녀들을 일본군성노예로 파견하는 것까지 돕고 독려하였습니다. 군이 성매매를 알선하는 건 전근대의 전쟁사에서 드문 일은 아니지만 병참산업으로서 인식하고 운영한 게 아니라 노예화한 것은 이례적입니다. 일제 때 군위안부는 일본인과 조선인, 중국인, 네덜란드인 등 국적에 따라 처우가 다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그들이 내지(內地)라 부르던 일본 열도 바깥에서 조선인 등을 끌고 갈 때에는 ‘모집’이 아니라 ‘납치’와 ‘인신매매’를 일삼았습니다. 자원했다 해도 대부분 일종의 취업사기를 당하고, 나중에는 구금 상태에서 탈출하지 못했다고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다만 어느 시대에나 현상은 단일하지 않고 복잡하고 서로 모순되는 경우들을 포함한다는 점을 기억해 두십시오. 지금은 간단히 그 대강을 스케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일제에 부역하여 호사를 누리고, 대한제국 말기 매국에 가담한 이들의 자손 중에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도 있었고, 일본인 가운데 조선 독립에 나선 사람도 있었습니다. 황실을 섬겼으나 ‘이제 새 시대’라며 ‘민국’의 건설에 앞장서 나선 이들도 많습니다. 국권 찬탈 즉시 전재산을 바쳐 [신흥강습소 시기를 거쳐]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한 이회영, 이동녕 선생이 있고, 여기서 배출된 이들 — 1930년 기준 약 3,500명 — 이 임시정부를 이끌고, 항일전쟁을 이끌며, 광복 후 정부와 군에서 활약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철균, 이범석, 지청천,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 등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같은 시대, 같은 조건에서 이토록 상이한 움직임이 가능했을까요?

그들은 다른이들을 바라보고, 고민하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자 다짐하고 실행한 사람들입니다. 마치 환인의 아들로 천상에 살아도 충분했을 환웅이, 땅위에 사는 이들을 염려한 것처럼. 청원하고, 다가가고, 가르치고, 섞이어 살며 희로애락을 같이한 것처럼.


그 정신을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라고 적고 있습니다. 단군에 대한 많은 기록은 일제시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압취됐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 [일제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고 진단학회를 설립하는가 하면, 해방직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문리대 교수, 대학원장, 중앙도서관장, 박물관장, 1960년에는 짧은 기간이지만 대한민국 제7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한] 이병도 교수가 1986년 개천절을 맞아 신문에 게재한 글*에서는 역대 왕조가 단군제사를 지냈는데, 이게 일제 때 끊겼다고 쓰기도 했습니다. 단군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라는 주장은 그가 평생 해 온 주장이기도 합니다만, 짧고 대중을 향해 풀어쓴 글이어서 소개합니다.


그래서 단군에 대한 사적 또한 많았다고 하지만 현재는 확인할 수 있는 게 적어 전모를 알 수 없고 추측할 따름입니다만,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는 눈에 띄는 사상입니다.

<재세이화>는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에 맞게 바꾸어간다’는 말입니다.

<홍익인간>은 흔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고 옮기지만, 해당 출전에서 한자의 배열을 국역하는 원칙을 동일하게 적용한다면, ‘인간’을 목적어로 볼 수도 있지만, 주어로 해석하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사실 <재세이화>는 이미 앞말이 뒷말을 꾸미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고, 그렇게 옮기지 않았습니까? 한중일 삼국을 비롯 동아시아에서 한자문화를 공유하지만 한자의 생김새나, 특히 문자를 배열해 문장을 쓰는 법, 어순 등은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하면 ‘홍익’은 주어인 ‘인간’을 꾸미는 수식언입니다. ‘위대한 정복자’ ‘자애로운 군주’ ‘그리스와 페르시아, 이집트의 왕이신 알렉산드로스’ 같은 호칭에서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우리가 가진 약소한 기록 속에서 저 옛날 조선을 건국한 국조의 정신은 ‘널리 이롭게 하는 인간’이 되어서 ‘세상에 머물러 세상을 이치에 맞게 돌아가게 하자’는 것이 됩니다. 그 구체적 방법이야 궁리하고 이야기해 봐야겠지만, 우리가 ‘무얼’ 하는지는, 적어도 처음에 ‘왜’ 이 모든 일을 시작하였는가 하는 기원신화에 대어서 살피자면 명료하게 제시된 셈입니다.


우리는 대상이 아니라 주체입니다.

주체로서 사고하는 자는 딱히 이 신화가 없어도 어디서나 그처럼 생각합니다. 세상이 왜 이래, 나한테 왜 이런 일이? 하고 묻는 대신에 나는 어떻게 살까, 나는 너를 어떻게 대할까, 나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까, 바꿀까? 하고 묻습니다. 이 물음에서 주어가 자신이기 때문에, 다행히도 다른 누구에 의지하지 않고도 스스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러저라하겠노라고.

물론 실행하면서는 기쁘게 도움을 청하고, 기쁘게 서로 의지할 수 있습니다.

다만 출발은 이래야 합니다.

이렇게 주체로서 사고하는 자는 신화의 도움 없이도 자기 자신의 신화를 써내려갑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더 큰 세상을 꿈꾸고, 더 많은 이가,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꿉니다. 언제나 큰 꿈에서, 모든 인자(因子, factor, gene)가 대등하다면 ‘더 큰’ 꿈이 됩니다. 그리고 큰 꿈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와 같이 꿈꿉니다. 그래서 꿈은 더 커지고 짙어집니다. 더 분명하게, 좀 더 이르게 현실로 구체화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오랜동안 “생각하는 자라야 산다”고 기억했던 함석헌 선생의 말씀은 확인해 보니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였고, 달리는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산다”로도 쓰인 모양입니다.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두 표현을 다 접하고 머릿속에서 저렇게 갈무리하였던 셈이지요.


그대는 ‘생각하는 자라야 산다’는 걸 새기기 바랍니다.

생각하는 자라는 건 스스로 주어가 되는 이를 일컫습니다. 생각한다는 건 스스로가 주어가 되는 일입니다. 다른이가 생각하여 쓰고 버리고 고치는 재료가 아니라, 다른이가 가꾸거나 부러뜨리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살피고, 스스로 서서, 자신과 타자를 돌볼 줄 아는 이, 곧 ‘세상-안에-있고-세상을-만드는-이’입니다.


이렇게 주인됨이 생각의 시초입니다.

내가 타자를 어떻게 여기는가를 살펴 아끼고, 돌보고, 살피면, 내가 올바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표지로 여기십시오.







*이병도가 쓴 글 전재(全載)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 조간 5면)


※ 원본 데이터가 손상된 경우 글자가 ㅁ 또는 공란으로 표기됩니다.


단군(檀君)은 신화(神話)아닌 우리국조(国祖)


"역대왕조(歷代王朝)의 단군(檀君)제사 일제(日帝)때 끊겼다"


원로(元老) 문헌사학자(史学者) 이병도(李丙燾)씨 본지(本紙)특별기고(寄稿)


"요(堯)와함께 개국(開国)…기자(箕子)보다 앞서 입국(立国)"


삼국사기(三国史記) 이전 고기(古記)등 기록(記録) 믿어야


웅녀(熊女)는 곰 토템족(族) 여자‥‥천신족(天神族) 환웅과 결혼


구월산(山)은 궁궐(宮闕) 있던 궐산(闕山)의 장음화(長音化)된 이름


진설도(陳設図)-세연가(世年歌)등 물증(物証)많아


이병도(李丙燾)


대체 천(天)이란 말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천(天)을 군장(君長)의 뜻으로 해석할때에는 개천절(開天節)은 즉「군장(君長)을 개설(開設)한다」는것이 되므로 개국(開国),건국(建国)의 뜻이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개천(開天)은 즉 최고(最古) 시조인 단군(檀君)의즉위와 개국(開国)을 의미하는 개천(開天)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삼국유사(三国遺事) 기이(紀異) 제1권의「고조선(古朝鮮)(왕검조선(王儉朝鮮))」조(條)에 의하면『단군왕검(檀君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고 국호(国号)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고 했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桓雄)이「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理念)을 가히 실현확만하므로 하늘이 그를인간세계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니 환웅(桓雄)이 무리 3천을이끌고 태백산정(頂) 신단수하(神壇樹下)에내려와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그를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하게 되었는데,그는 풍백(風伯)(풍신(風神))우발(雨㤄)(우신(雨神))운발(雲㤄)(전신(電神))의 삼신(三神)을 거느리고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형(主刑) 주선악(主善惡)등 무릇 인간삼백육십여사(人間三百六十余事)를 주관(主管)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이것은 일견지상국가를 천상국가의 한연장으로 관념(観念)한데서 생긴신화와같이 보이나 이 신화를 검토하면 환웅(桓雄)천왕의 존재는 실상 지상국가를 개창한 군장(君長)이라기 보다는 인간사회의 백사(百事)를 주관하는 수호신적(守護神的)성격을 가진 존재임을알 수 있다.


서낭당은 천왕당(天王堂)


이 수호신(守護神)의 주처(住処)는 곧 신단수(神壇樹)로 이것은 지금 민속(民俗)중에 생생히 남아 있다.다시말하면 지금의 서낭당이 그것이니 선왕당(仙王堂)(서낭당)은즉 천왕당(天王堂)인 것이다.이 서낭당의 나무가 곧 신단수(神壇樹) 그것이고 그 밑의 돌무더기가신단(神壇)이다.그리고 옛날에 이신단(神壇)을 중심으로 한 부락이신시(神市)였던 것이다.


신단수(神壇樹)는 실상 원시사회의수목숭배(수목숭배(樹木崇拜))에서 시작되어 처음에는 수목(樹木)자체가신(神)그것이었는데,그후 변천하여 신단수(神壇樹)는 천신(天神) 천왕(天王)의 강하계단(降下階段),혹은 천왕(天王)의 주처(住処)또는 그것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하고 옛날의국호(国号)는 대개 도읍지의 이름과 일치하므로 단군의 도읍지라고하는 아사달(아사달(阿斯達))이 정작 국호였고 조선(朝鮮)은 후에 이르러「아사달(阿斯達)」을 아역(雅訳)한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大) 논문집(사회과학(社会科学))제2집에「아사달(阿斯達)과 조선(朝鮮)」이란졸고를 통해서 자세히 발표하였다.환웅천왕이 웅녀(熊女)와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이야기가 고기(古記)에 전하여오지만여기의 웅녀는 고기(古記)에는 웅(熊)이 여신(女身)으로 화(化)한것이라 하나 이는 웅(熊)(곰)토텔족(族)의 여자로 해석하여야 옳다고 나는 연래(年來) 주장해 오고있다.


즉 웅(熊)을 신성시(神聖視)하여 자기의 조상이 곰에서 나왔다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란 뜻이다.그리고 보면 웅녀는 지상족(地上族)이라 할 수있고 이에 대하여 환웅은 천상족(天上族) 천신족(天神族)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단군은 즉 이 천신족(天神族)과 지신족(地神族)과의 결혼에서 생긴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0월3일(음력)을개천절(開天節)이라하여 단군(檀君)의 개국일(開国日)로 기념하여온데는역시의의가 있는것으로 보지 않을수없다.원래 십월절(十月節)은 종교적으로나 민속적으로 큰의의를 가진 달이다.


즉 4월절(月節)은 4계절의 하나로서 계절과 농업과는 큰관계를 가졌으므로 고대 농업사회에서는「계절(季節)」이란것을 상당히 중시하였다.그래서 계절마다 부락공동체의종교적 대제전(大祭典)이 행해져 신인공락(신인공악(神人共樂))의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이를 계절제(季節祭)(Season festival)라고 하는것인데 계절제중에도더 중요시하는것이 낙종(落種)(하종(下種))시의 계절제와 추수기의계절제였다.


이 두 계절제는 어느 계절제보다 더 중요시하고 따라서 그 의식도 성대하였다.전자는 즉 신(神)에게 연사(年事)의 풍등(豊登)을 기원하는것,후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 혹은 천신제(薦新祭)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T—hanks giving」이라 하여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낙종기(落種期)의 제전(祭典)을 오월(五月)에,추수기의 그것은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천신(天神)에게 제사하고 가무(歌舞)와 음주(飮酒)로 주야를쉬지않고 즐겁게 놀았는데(군민(君民)이 동락(同樂)하였는데)이제사를수리라고 했던것같다.후세에 5월단오(端午)를 수릿날이라하여 수리취떡을 만들고 술을빚어 여러가지의 놀이를하며 십월(十月)을 상달이라하여초생에 집집이신(神)에게 고사하고,선조무덤에 시제(時祭)를 지내는풍속이 있지만 이야말로 옛날로 부터 내려오는 오월제(五月祭) 십월제(十月祭)의 유풍(遺風)이라할 것이다.


「상달」은「수리달」


「수리」란 말은 상(上),고(高),산(山),신(神)등을 의미하는 고어(古語)로 그어원은「솟」「소슬」에 있다고 생각된다.그리고 보면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것도즉「수리달」의 역(訳)으로 볼 수밖에 없다.부여(夫余)의 영고제(迎鼓祭),고구려(高句麗)의 동맹제(東盟祭),동예(東濊)의 무천제(舞天祭)가 다 이러한 추수감사제인 것은 더 말할것도 없고고려시대에 성행하던 연등대회(燃燈大会),팔관대회(八関大会)도 춘동이기(春冬二期)의국가적 대제전이었지만 그중에도 가장 성대하던것이 중동팔관(仲冬八関)이었다.그런데 최근세 갑오경장이후로 민족의식민족정신이 앙양됨에 따라이 10월절의 고속(古俗)을 갱생시켜 이로써 단군립국(檀君立国)의 개천절(開天節)을 삼은것은 오랜 전통에기인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옛날민속에 흔히 음력10월초생 특히 3일에「고사」를지내왔다는데 왜 3일을 택했느냐하면 3이란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되는 수인까닭이다.3은 정족(정족(鼎足))의 수인만큼 안정감을 가진것이니 1이나 2는 실상 불안정감(不安定感)의 수이다.


일제의 멍에를 벗고 해방이 되자 그해로부터 개천절을 우리의 전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행하여 오다가 정부수립후에는 양력10월3일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 말한것들은 졸저「두계잡필(斗溪雑筆)」에 이미 말한 바있다.그런데 현정회이사(顯正会理事) 이희수(李喜秀)씨가 1977년 10월「현정지(顯正誌)」에「사서상(史書上)에서 본 국조단군(国祖檀君)」이라는 제목하에서삼국유사(三国遺事)의 저자 일연(一然)이 지금은 없어진「고기(古記)」와「구삼국사기(旧三国史記)」와 현존 위서(魏書)와는 다른 또 하나의 위서(魏書)의 단군기사(檀君記事)에서 인용하였다고 그출처를 밝히고 있을뿐 아니라 사대(事大)의 입장에서 기술한 삼국사기(三国史記)의 저자 김부식(金富軾)도 삼국이전의 사기(史記)를의식적(意識的)으로 피하려고 하면서도 여러곳에서고조선(古朝鮮)과 단군에 관하여 언급했다고 주장한바 있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国史記)에서 단군에 관한 기재(記載)를 제외하였지만 동서권십칠(同書卷十七) 고구려본기오(高句麗本紀五) 동천왕이십일년춘이월조(東川王二十一年春二月條)에「왕이환도성경난불가복도축평양성이민급묘사평양자본선인왕검지택야혹운왕지도왕검(王以丸都城經乱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이라고 하였다(혹운(或云)이하의 왕지(王之)는 왕(王)노릇을 하였다는 동사(動詞)로 읽어야하고「도왕검성(都王儉城)」의 도(都)도 동사로 읽어야 할것을 잘못「왕지도왕검(王之都王儉)」이라고연서(連書)하였다).그뿐아니라 이때의 평양(平壤)은 지금의 평양(平壤)이 아니라 고구려(高句麗)의황성(黄城)(황성(皇城) 즉 환도성(丸都城))의 대안(対岸)인 동황성(東黄城)(금강계(今江界))인 것이다.지금의 평양(平壤)에는 아직도 이때 낙랑군(樂浪郡)이 건재하였기 때문이다.그런데「선인왕검지택(仙人王儉之宅)」이라고 한 평양(平壤)은후일의 평양(平壤)(지금의 평양(平壤))의지칭이므로 전후자(前後者)를 혼농하여서는 안된다.


당시 평양(平壤)은 다른곳


김부식(金富軾)과같은 사가(史家)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고성기자지택(古聖箕子之宅)이라고 하지않고 선인왕검지택야(仙人王儉之宅也)라고 한것은 김부식(金富軾)의머리속에 지금의 평양(平壤)이 선인왕검(仙人王儉)의 도을지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史実)이었기 때문이었을것이다.내외사서(内外史書)들이한결같이 지금의 평양(平壤)을 왕검성(王儉城)이라고 하는데는 이의(異議)가없었던것 같다.


김부식(金富軾)이 고기(古記)를 인용한부분을 보면 ①사기지리지고구려조(史記地理志高句麗條)에서「고기운주몽자부여도난지졸본칙흘승골성(古記云朱蒙自夫余逃難至卒本則紇升骨城)」②사기(史記) 지일(志一) 제사조(祭祀條)에서「고기운온조왕이십년춘이월설단사천지(古記云温祚王二十年春二月設壇祀天地)」③사기(史記) 열전(列伝) 김유신상(金庾信上)에서 김춘추(金春秋)가 강화(講和)하려고고구려(高句麗)에 갔던 기록가운데주석을 달기를「차여본언진평왕(此与本言眞平王) 십이년소서일사이소이이개고기소전고양존지(十二年所書一事而小異以皆古記所伝故兩存之)」라고하였다.


여기서 보면 고기(古記)에는 단군기사(檀君記史)가 기재되어 있을뿐아니라 그 기록이 고구려(高句麗)에 김춘추(金春秋)가 갔던 서기(西紀)64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수있다.또 김부식(金富軾)이 사기(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동천왕(東川王) 이일년서이월조(二一年書二月條)에서「평양(平壤)은 본래 선인왕검(仙人王儉)의 택(宅)」이라고 한것은역시 고기(古記)이거나 단군기(檀君記)를 인용한것으로 밖에는볼수없다.그리고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国史記)에서 신라(新羅)의 육촌(六村)도 조선(朝鮮)의 유민(遺民)이 산간(山間)에 와서 자리잡은것이라고 밝히고 있다.삼국사기(三国史記) 권제일신라본기제일(卷第一新羅本記第一)에보면「시조성(始祖姓) 박씨(朴氏)…즉위거서간시년십삼국호서나벌선시조선유민분거(即位居西干时年十三国号徐那伐先時朝鮮遺民分居) 산곡지간위육촌(山谷之間爲六村)」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일연(一然)이 인용한고기(古記)의 단군기재(檀君記載)를 근거있다고 볼수가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김부식(金富軾)이 평양(平壤)이 선인(仙人)(단군(檀君))왕검(王儉)의 택(宅)이라고 명기한데서 고기(古記)가 단군기사(檀君記事)를실재(実載)하였다고 볼수가 있다.일연(一然)이 마치 근거도 없는 고기(古記)를 들먹여서 단군기사(檀君記事)를지어냈다고는 볼수가 없다.


우리민족이 여러차례의 국난(国難)을 겪으면서도 단군묘(檀君廟)에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축제때에는 노래(세연가(世年歌))에의하여 단군(檀君)의 사적을 전해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녹권(世宗実錄卷)40 세종(世宗)10연무신(年戊申) 6월조(月條)에 유관(柳寬)의 상서(上書)를보면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 동령(東嶺)허리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때에 세웠는지 알수 없으나 북벽(北壁)에 환웅천왕(桓雄天王),동벽(東壁)에 환인천왕(桓因天王),서벽(西壁)에 단군천왕(檀君天王)을 모셨는데 문화현(文化縣)사람들은 이를삼성(三聖)이라고 일컬으며 산아래부락을 성당리(聖堂里)라고 한다고하였다.유관(柳寬)은 그 상서(上書)중에서「구월산(九月山)은 현(縣)의주산(主山)이던 단군조선(檀君朝鮮)때에는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하였으며,신라(新羅)에 와서궐산(闕山)이라고 고쳤다.그때에문화현(文化縣)을 궐구현(闕口縣)이라고 처음에 이름하였다.고려(高麗)때에 유주감무(儒州監務)로 하고 후에 또 문화현(文化縣)으로 고쳤다.산이름의 궐(闕)자를 느리게 소리내어 구월산(九月山)이라고 부른다.


두 수(首)의 시(詩)에 나타나


문화(文化)의동쪽에 장장(藏壯)이라고하는 지명이있다.부로(父老)들이 전하기를 단군(檀君)의 도읍지(都邑地)라고한다…」하였으며「구월산하(九月山下)에는 환웅(桓雄)을 남면(南面)으로 모시고동서향(東西向)으로 환인(桓因)과 단군(檀君)을모신 삼성당(三聖堂)이 지금도 존재하며 단군(檀君)이 입도(立都)하였다는 자취를 볼수있다」고 하였다.


세종(世宗)18년 병진(丙辰) 12월정해조유사눌(月丁亥條柳思訥)(유관(柳寬)의 조카)의 상서(上書)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신이세연가고지단군초도평양후도백악무정팔년을미입아사달산위신기가일형국일천사십(臣以世年歌考之檀君初都平壤後都白岳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其歌日亨国一千四十)팔지금묘재아사달칙기무소거호우황고려건묘어구월산하기당우위판유존여세연가합(八至今廟在阿斯達則豈無所拠乎又況高麗建廟於九月山下其堂宇位版猶存与世年歌合)」.


이로써 보면 고기(古記) 단군기(檀君記)외에 가사(歌詞)형식으로 된 단군기사(檀君記事)가 전해지고 있었음을알 수 있다.또 그 세연가(世年歌)는 사실들과 부합되니 단군기재(檀君記載)에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유사눌(柳思訥)은 한성부사(漢城府使)를지냈는데 또 상서하기를「신(臣)이 단군세연가(檀君世年歌)를 보니 단군(檀君)은 조선(朝鮮)의 시조입니다.그출생이 일반사람과 다르고몰(沒)함에 신(神)이 되었다」고 하였다.어쨌든 조선세종대(朝鮮世宗代)까지 단군세연가(檀君世年歌)가 남아있었고식자(識者)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기해 둘만한사실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유관(柳寬)의 상서(上書)에 따르면 삼성당(三聖堂)은 황해도(黄海道) 구월산(九月山) 동령(東嶺)에 있다.유관(柳寬)은 젊었을 때부터 거기에 내려가서 부로(父老)들로부터 단군사적(檀君事迹)이 오래되었음을 알았다고했다.삼성당(三聖堂)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을상좌(上座)에 모셔서 남면(南面)하게하고동벽(東壁)에는 환인천옥(桓因天玉)을 모셔서서향(西向)하게하고 서벽(西壁)에는 단군천왕(檀君天王)을 모셔서 동향(東向)하게 하였다고 한다.삼성당(三聖堂)의 경내외에는 새짐승들이 서식하지않으며 산짐승도 들어가지않는다고 했다.또 가뭄이 심할때 빌면 비가 내린다고했다.


문헌비고(文献備考) 권(卷)64 예고(礼考)1에는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삼성사(三聖祠)는 황해도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에 있으며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모셨으며 춘추(春秋)로 제사를드린다하고,역시 문헌비고(文献備考)에의하면 조선조 성종(成宗)13년에황해도관찰사 이예지(李芮之)의 말에좇아서 구월산(九月山)에 삼성묘(三聖廟)를세우고 평양(平壤)의 단군묘(檀君廟)의 예에 따라서 매년 향축(香祝)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하였다.동국여지승람(東国輿地勝覽) 권(卷)42 문화현사묘조(文化縣祠廟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삼성사(三聖祠)는 환인환웅(桓因桓雄) 단군(檀君)의 사(祠)이다.춘추로제사를 지내며 가물때 빌면효험이 있다.」


「동국여지승람권(東国輿地勝覽卷)51평양조(平壤條)」에보면 두 수(首)의 시(詩)를 통하여「개국(開国)한지가 멀고 먼 단군(檀君)은조선시조(朝鮮始祖)이다.단군(檀君)의 역사는 언제 비롯되었는가.요(堯)와함께 개국(開国)하였다고 들었으니거금(去今) 사천년(四千年)이며 단군묘(檀君廟)를남겼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주체(主體)사상이 담겨 있음을알수있다.고려 조선양조를통하여 1전년간에 단군에대한 국가적 태도는 묘(廟)를 세우고 제사(祭祀)를 받드는등 자못 융성하였다.이것은 단군을 국조(国祖)로 섬겼음을 알수있다.


세종(世宗)때 새사당(祠堂) 지어


문헌비고(文献備考) 권(卷)13 여지고(輿地考)1역대국계(歷代国界)1에서는 단군조선국(檀君朝鮮国)을 첫머리에 싣고 유사(遺事)의기록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백악(白嶽)은 지금의 문화현(文化縣)이며구월산(九月山)의 본명은 궐산(闕山)인데단군(檀君)의 궁궐터가 있기 때문이다.궐산(闕山)은 소리를 느리게내어 궐산(闕山)이 구월산으로 와전되었으며 구월산(九月山)의 장당경(藏唐京)은 또 장장평(藏藏坪)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세종때의 사(司)□주부(注簿) 정척(鄭陟)의상서에 의하면「평양(平壤)의 기자사당(箕子祠堂)에 가보니 기자(箕子)의 위패(位牌)는 북쪽에 있어서 남향(南向)하였고 단군의 위패는 동쪽에 있어 서향(西向)하였다.신(臣)의 생각으로는 단군은 당요(唐堯)와 같이 입국(立国)하였고 기자(箕子)는 무왕(武王)의 명으로 조선(朝鮮)에 봉하여졌으니제왕력연수(帝王曆年数)로 보더라도 제요(帝堯)에서 무왕(武王)까지는 1230여년이 된다고 하였읍니다.그러니 기자(箕子)가 북향하여 남면(南面)하고 기자(箕子)보다 앞서서 입국(立国)한 단군(檀君)을 동(東)쪽에 배향(配享)하는것은 입국전세(立国伝世)의 선후에 위배됩니다.신(臣)이 본조(本朝)의 제사의식(諸祀儀式)을 고찰해보니 단군제(檀君祭)의진설도(陳設圖)에 이르기를「신위(神位)는당(堂)의 중앙에 모셔서 남면(南面)토록되어 있으며 신(臣)이 기자사(箕子祠)에서 본서향(西向)의 좌(坐)는 진설도(陳設圖)와 맞지 않다.


만일 단군을 기자(箕子)와 나란히 남향(南向)하게하더라도 단군을상좌(上座)에기자(箕子)를다음에앉히는것이 입국(立国)의 선후에 어긋나지않을 것이다.그러나 이름이 기자사당(箕子祠堂)인데 단군을 주신(主神)으로 하는것도 편치않습니다.그러므로 신(臣)의 생각으로는 따로 단군사당(壇君祠堂)을 지어서단군(檀君)을 남향(南向)하게 하고 제사(祭祀)를 받들면 사의(祀儀)에도 맞을것같다」고 하였다.이에 대하여 세종은 예조(礼曹)에 명하여 정척(鄭陟)의 장서대로 시행토록 하였다.이상에서 보면 단군은역대왕조에서는 국조(国祖)로서 사당(祠堂)을 세우고 제사(祭祀)를 받들었으니 기자(箕子)보다는 상위(上位)로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그러니까단군(檀君)의 제향(祭享)이 끊어진것은 일제(日帝)때부터였다고본다.


단군조선(檀君朝鮮) 연구 숙제


삼국유사(三国遺事)의 단군기재(檀君記載)는 타서(他書)등에서 뒷받침되는바가 없지 않으므로 믿을만한 것이며 일연(一然)의 창작은 결코 아님을 알수있다.일연(一然)이 인용한고기(古記)도 김부식(金富軾)의 인용 고기(古記)와 일치되는 바가 많으므로고기(古記)는 당시에 분명히 있었으며 김부식(金富軾)도 선인왕검(仙人王儉)과그 도읍지를 평양(平壤)으로 알고있는 것으로 보아 고기(古記)에는단군사기(檀君史記)가 분명히 있었음을또한 알수있다.또 단군(檀君)의 세연가(世年歌)가 전하여져서 많은 식자(識者)들이 알고 있었으며 여러곳에 단군(檀君)의 사묘제천단(祠廟祭天壇)등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또 향단군진설도(享檀君陳設図)가 세전(世伝)되어왔고그것은 단군제의(檀君祭儀)가 끊이지않았음을 알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이 역대왕조에서는조의(朝議)에 의하여 건묘(建廟) 봉제사(奉祭祀)했던 것이다.만일 단군이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있을 수 있었겠는가.아믛든단군과 단군조선에 관한 기재(記載)는 숙제로 남길지언정 신화(神話)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고생각된다.삼국사기(三国史記)에서 단군기재(檀君記載)를 제외한 것은 김부식(金富軾)의 사대적(事大的)태도보다는 ①삼국사기의 명분상 삼국이외에는 부여(夫余) 등도 모두 제외하였으며 ②신라중심의 삼국사(三国史)로하였고,신라보다 상대(上代)의 역사는 피하려고 한 데다 ③단군을 부인하려는 생각보다는신라사를 돋보이게 하려는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볼수있다.



[출처 :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2015919861009m1055&set_date=19861009&page_no=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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