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나는 날 평화를 기억하다 — 11.11. 유엔참전용사국제추모의날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과 독일제국 사이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며 제1차 세계대전이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 종전일을 미합중국에서는 ‘재향군인의 날’로, 한국에서는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로 기념합니다. 그런데 이 날을 한국에서는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로 기념합니다. 이 날을 기념하는 연유는 한국전쟁(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희생·헌신한 United Nations(유엔) 참전용사들의 공헌을 기억하고, 여러 참전국과 함께 추모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정부는 2020년 3월, 『유엔 참전용사의 명예선양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이 날을 법정기념일로 의결하였습니다. 또한, 이 날 대한민국에서는 매년 부산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11월 11일 11시”에 참전용사들을 위해 묵념·추모하는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럼 한국전쟁과 11월 11일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한국전쟁과 11월 11일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럼 왜?
여기서부터가 이야기의 몸통이고, 감동과 성찰이 우러날 자리입니다.
유엔참전용사의 명예선양 등에 관한 법률(이하 ‘법률’)의 제정 배경이야 명료합니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6·25전쟁) 당시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참전한 UN 참전용사들을 기리고, 참전국과의 우호를 증진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특히,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 및 명예선양이 기존 보훈정책에서 충분히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되었습니다. 민간에서도 한국전쟁이나 독립운동가 등 국가유공자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 최근 몇 년 간 사람들이 후원하고 인식을 제고하는 홍보에 참여하는 등 조명과 환기가 이루어지고 있지요. 그런데 11월 11일을 기념한 것은 그 출발이 지구 반대편 다른 나라였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연합국과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 정전협정’(Compiègne Armistice)을 체결하였다고 얘기했습니다. 이 날은 이후 “Armistice Day”, “Remembrance Day”, 또는 “Veterans Day(미국)”로 기념되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전몰군인을 추모하는 날이 되었지요. 유엔(UN)의 전신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United Nations)이었던 점에서, 11월 11일은 ‘국제적 전쟁 희생자 추모일’로 자리 잡았습니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연결은 그렇다쳐도 이게 어떻게 한국전쟁으로 이어질까요?
2000년대 초,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의 한 역사 교사 빈스 커트니(Vince Courtenay)가 자국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해마다 11월 11일 오전 11시, 전 세계 어디서든 1분 동안 부산(한국 유엔기념공원)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이 아이디어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기념일(11월 11일)을 계승해, “한국전에서 싸운 22개 유엔참전국의 용사들을 위한 국제적 추모의 연대 행동”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캠페인의 이름이 「Turn Toward Busan」, 즉 “부산을 향해 몸과 마음을 돌린다”입니다. 이 운동은 2007년,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정부와 캐나다 보훈처(Veterans Affairs Canada)가 이 캠페인을 공식 채택하면서 본격 확산되었습니다. 「Turn Toward Busan」는 이후 영국, 미국, 뉴질랜드, 호주 등 유엔참전국의 재향군인단체와 교회, 학교 등으로 확산되어, 11월 11일에는 각국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묘지나 추모비 앞에서 부산을 향해 묵념하는 행사가 이어졌답니다. 특히, 이 캠페인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 아니라 “기억되어야 할 연합의 전쟁”으로 다시 불러내는 상징적 움직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가보훈처와 부산시, 그리고 유엔기념공원관리처(UNMCK)가 이 캠페인에 참여한 것은 2010년이 되어서입니다. 이때부터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각국 외교사절, 주한 유엔군사령부 관계자, 참전용사 및 후손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과 묵념 행사가 정례화되었습니다.
행사의 핵심 구호는 바로
“Turn Toward Busan, at 11 a.m., on the 11th day of the 11th month.”
(11월 11일 오전 11시, 모두 부산을 향해 고개를 숙입시다.)
이 구호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기념일의 형식(11월 11일 11시 11분)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며, “전쟁의 종식과 평화의 기원을 하나로 잇는 국제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민간이 시작한 추모 운동은 뜻에 동조하는 개인들로부터 민간 및 국제적인 자발적 행사로 이어져 잊혀진 전쟁을 기억할 국제 연대의 전쟁으로 기억케 하였습니다. 한국정부는 2019년에 이를 제도적으로 공인하고 계승하기 위한 법안을 준비하였습니다. 그 결과, 2020년 3월 24일 「유엔참전용사의 명예선양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 제5조 제2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매년 11월 11일을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로 한다.”
이로써 2020년 9월부터 법적 효력이 발생했고, “Turn Toward Busan” 행사는 한국의 공식 국가기념일 행사로 격상되었고, 이후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주관하는 국가행사로 열리고 있습니다.
이 법률은 참전용사의 명예를 선양하고 참전국과의 우호 증진을 위한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계획을 수립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매년 11월 11일을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로 지정한 것 외에도 참전용사의 공적을 발굴하고, 참전국과의 교류 협력, 참전시설 건립과 관리에 대한 지원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법 제정은 보훈정책의 범위가 확대되었음을 의미하고, 한국전쟁을 지나간 사건, 망각되어가는 전쟁으로 남겨두지 않고 참전국과의 우호 증진, 전쟁을 통해 — 전쟁을 무릅쓰면서까지 지켜낸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돌이켜보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부산은 세계에서 유일한 유엔기념공원(UN Memorial Cemetery)이 있는 도시입니다. 공원 바로 옆에는 유엔평화기념관이 있고, 아래로는 대연동의 주거지역과 부산대학교가 있습니다. 구불구불 고개를 오르며 좌우로 방향을 바꾸지만 맨 아래에서 맨 위까지 거의 끊기지 않고 유엔기념공원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공원에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11개국 2,300여 명 전몰장병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Turn Toward Busan”은 단순한 방향전환이 아니라, 전쟁의 희생이 한반도와 세계 평화의 연결고리가 되었음을 기억하자는 행위입니다.
사실 한국전쟁만을 떠올린다면 1953년부터 7월 27일 한국전쟁정전협정일을 기려 유엔군의 희생과 공헌을 직접 기념코자 ‘유엔군 참전의 날’을 기념해 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역사적 맥락을 뛰어넘어 이를 도리어 국제적인 전쟁 희생자 추모라는 보편적 맥락에 합치한 결과가 현재의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인 것입니다.
우리의 기억은 협소한 뜻에서의 우리의 기억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잊어가는 동안 지구 곳곳에서 살아있는 기억과 기억을 살리려는 노력이 마주쳐 소리를 냈고, 도리어 우리가 늦게 화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늦은 화답은 가장 진지한 화답이어야겠습니다. 마치 “가장 늦은 통일을 가장 멋진 통일로”라는 노랫말처럼 우리가 늦은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비로소 완성의 의미를 지닐 수 있게, 숨은 뜻을 가장 환하게 펼쳐 보이는 일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인류는 오랜 분쟁의 기억과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문명의 결실처럼 이야기하는 — 어느 정도 정당한 주장인 바 — 국가의 성립 후 분쟁은 도리어 대규모로, 고강도로, 더 지속적인 상흔을 남기며 ‘전쟁’을 탄생시켰습니다. 국가 성립 후 문명의 역사란 전쟁의 역사가 아닌가 싶을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압도적인 힘으로 평화를 얻으려는 숱한 제국들을 지나쳐 인류는 공멸의 공포를 느낀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이제 어느 한쪽도 다른 한쪽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준 한국전쟁, 강대국도 작은 나라의 전쟁조차 완전히 제어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해 준 베트남전쟁을, 제어는커녕 수습할 수조차 없다는 걸 깨우쳐 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양대강국의 퇴각(한 번은 소비에트연방, 한 번은 미합중국)까지 경험하였습니다. 그중 한국전쟁은 평화를 위해 국제 연대가 발동한, 국제연합군이 소집되어 치른 처음이자 아직까지도 유일한 전쟁입니다. 처참한 동족 상잔의 비극이지만, 국제연대의 이상과 투신이 아로새겨진 평화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그에 걸맞는 작은 기념일입니다. 작다는 건 정말로 사람들이 잘 기억하지 않는 기념일이어서입니다. 그러나 부산의 산중도로를 오르내리며 우뚝 솟은 기념탑과 건물을 볼 수 있고, 다가서면 21개국의 깃발이 보입니다. 대부분 지나치겠지만 한 번쯤 마음 먹고 내려서 처음 21개국 11,000위가 봉안되었다가 신원이 확인된 영령들을 고국으로 송환하고 터키, 영국 등 11개국 2,300여 유해가 안장된 납작한 사각의 묘비들 사이를 거닐어 보십시오. 무명용사의 길을 걸으며 산 자와 죽은 자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오늘 내가 쉬는 숨이 저들이 바치고 거둔 숨 뒤에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느껴 보십시오. 어떻게? 그냥 상상하고, 가만히 기다려 보십시오. 비둘기 날갯소리나 바람 한 줄기, 다른 무엇으로건 문득 느낄 것입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와 함께 거닐고 있다는 것을.
평화를 빕니다.
저들이 피 흘려 지킨 평화를, 나는 땀 흘려 지키겠습니다.
기왕이면 당신과 함께, 신명을 내어 지켜보겠습니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