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달빛독서

초콜렛: 변화의 맛

by 이제월


인지도에서만 아니라 오해받는다는 면에서 더욱 ‘숨겨진’ 영화 <초콜렛>을 소개하겠습니다.

원문은 2000년대 초반에, 활동하던 영화 카페에 올린 글입니다.



<초콜렛>: 변화의 맛*


기본 사항 ||

라세 할스트롬 감독

줄리엣 비노쉬, 주니 덴치, 조니 뎁 외 출연

2000년 작품(국내 개봉은 2001년)




이 영화와 관련한 실수 하나를 들자면, 국내 배급사가 이 작품을 ‘발렌타인 데이’에 ‘연인들’을 겨냥해 선전했다는 점입니다. 개봉일 자체도 그해(2001년) 2월 24일로 발렌타인 데이 열흘 뒤였다. 하지만 배급사의 실수는 그만두고 이 영화를 만나는 대다수 관객의 ‘습성’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 결과 영화는 오래 상영하지 못했고, 지금 이 영화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 상당수가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를 통해서야 이 작품을 만나보았을 겁니다. <초콜렛>은 단지 연인들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보편적 현상과 보편적 작용 자체에 대한 성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고 여러 해가 지나 인물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기억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줄리엣 비노쉬가 연기한 여주인공의 이름만은 지금도 기억하는데, ‘비엔’입니다. 비엔은 자신의 어린 딸과 함께 프랑스의 전통에 잠긴, 아주 푹 잠긴 마을 랑스크네로 이사옵니다. 발랄한 그녀는 처음부터 이 마을과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을을 사랑하고, 마을에 초콜릿 가게를 열며, 그녀의 초콜릿은 마법처럼, 마을을 변화시킵니다.

그중에서도 할머니와 손자를 다시 만나게 해 준 일은 스크린이라는 벽을 넘어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 할머니는 당뇨로 단 것을 먹어선 안 되는 처지이지만, 그럼에도 다시 초콜릿에 손을 대며 자기 삶의 마지막 며칠을 축제처럼 기쁘게 보냅니다. 초콜릿을 매개로 자기 주변에 화해의 손길을 뻗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화해를 청하고 이루었습니다. (영화를 직접 본다면 공감할 거라 확신합니다.)


<초콜렛>에서 랑스크네 마을에 이질적인 건 비엔만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영화 화면의 빛깔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비엔은 그 마을과 잘 어울린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뚜렷해지는 건 마을에 배를 타고 유랑민들(집시)이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의 경계와 혐오의 시선을 받지만 어쨌건 비엔을 비롯한 몇몇 사람에게는 반갑고 멋진 방문객입니다. 그러나 결국 반감을 가진 이들의 감정이 크기가 더 컸습니다. 그들의 배는 불길에 휩싸이고 맙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도 마을에는 변화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금욕’과 ‘자기부정’이 더 이상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걸 알아갑니다. 마을 본당[本堂, 주임신부가 상주하는 성당]의 젊은 신부는 실은 미국 팝송을 즐기고, 비엔과 그녀의 가게에 별다른 불만이 없지만 마을에서 대대로 지배권을 행사해온 시장의 권위에 눌려 초콜릿 가게는 이 경건한 마을에 어울리지 않으며 마을은 이 가게를 보이콧 해야 한다고 강론합니다. 이 설교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떳떳하게 초콜릿 가게를 드나들 수 없게 되고요.


그렇지만 신의 사랑은 신의 계율보다 무거운 법.

부활절을 앞두고, 자신이 마음을 둔 여비서에게 퇴짜를 맞은 시장은 초콜릿 가게에서 온통 초콜릿 범벅이 된 채 발견됩니다. 시장은 진열장의 유리를 깨고 초콜릿을 꺼내 정신없이 먹다가 흐느끼고, 먹다가 울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엔은 그를 채근하지 않습니다. 마을 사람 누구도 그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다만 시장의 비서가 그에게 “왜 말하지 않았느냐”며 다가설 뿐입니다.


비엔은 초콜릿을 조리하는 게 아니라 ‘조제’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녀는 마을에 음식을 판다기보다 마을을 ‘치유’합니다. 아니, <초콜렛>에서 비엔은 초콜릿을 만드는 장인(匠人)에 그치지 않고, 그녀 자신이 ‘초콜릿’입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이 ‘초콜릿’이 일으킨 변화에 푹 젖어들지 못합니다. 그녀의 변화는 다른 데서 오지요.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다 이야기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비엔이 변하는 건 비엔을 위해 먼저 자신을 바꾼 사람 때문에 가능했다는 겁니다.


이 마을 사람들의 변화는 단지 금욕으로부터 벗어나는 걸 뜻하지만은 않습니다. 이는 ‘고통을 견디라’는 신의 말에는 순종할지언정 ‘행복하여라’라는 신의 말에는 순종하지 못하는 완고한 인습(因習)에 젖은 사람들의 회개(悔改)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마음을 돌리는 것은 인습으로 정해둔, 개념으로 정해버린 ‘미덕’들이 아니라 삶에서 직접 맞닥뜨리고 자신들의 건강한 감성이 ‘좋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따르도록 이끕니다. 그런데 이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들을 누가 가르쳤던가? 아니었죠.

변화는 오로지 ‘맛을 봄’으로써 벌어집니다. 맛보는 행위 자체가 더욱 맛을 보게 만듭니다. 사랑을 하는 것 자체가 더욱 사랑하게 하고, 비로소 사랑을 알게-합니다.


<초콜렛>은 구체적인 시대상과 20세기 초의 사회변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계속되는 인간사회의 ‘낡아버린 인습’과 언제고 살아 있는 젊은 ‘새로움’ 사이의 부대낌에 대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특정 종교와 연계해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영화가 배경 삼은 그리스도교와 익숙한 관계로 성경 속 두 장면을 나란히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천지 창조의 장면입니다. 그때 하느님은 하나하나의 사물을 지을 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좋다”(원문: 이렇게 만드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또 하나는 신약성서의 장면으로 베드로가 이방인을 세례 주기를 꺼리고 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가 주저하고 있던 때, 하늘로부터 그가 먹어서는 안 되는 이른바 ‘불결한’ 음식이 바구니에 달려 내려옵니다. 베드로는 이를 하느님께서 자기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여겨 자신은 여태 게율을 어기거나 부정한 것을 먹은 일이 없노라며 한사코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하늘에서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더럽다 하지 말라.”는 말씀이 들려오고 바구니를 되가져갑니다. 그리고나서 베드로가 일층으로 내려오자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내립니다. 성령이란 하느님 자신이 인간과 자연 안에 거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이에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는 데 부정적인 다른 유대인들을 둘러보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고는 그들에게 마저 세례를 베풉니다.


인간의 감각과 이성은 스스로 노예가 되지 않는 한 바른 판단을 할 줄 압니다. 참된 것과 선악을 구분할 줄 압니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이로운 것을 알아보고 이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셨다면서요!

그러나 종종 얼마나 많은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이것들이 단죄되는지요! 사실상 ‘마음을 돌이킨다’(회심, 회개)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어기는 데서가 아니라 이를 억누르는 체제의 경직성을 벗어던지고 본래의 자유로운 모습을 찾아 사는 게 아닐까요?


비엔은 또 떠돌며 우리 곁에 올 것입니다. 초콜릿이 인간에게 먹힘으로써 맛을 보여주었듯이 — 맛 좀 봐라! —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 또한 스스로를 우리에게 내어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맛보고 울거나 웃지 못한다면 아직 우리는 딱딱한 조각상을 빠져나오지 못한 것일 겁니다.


초콜릿을 맛보는 일은 단지 초콜릿을 맛보았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맛보지 않(고 비난하)는 삶’에서 ‘[생의 모든 정당한 초콜릿을!] 맛보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삶의 방식이 구체적으로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기꺼이 사랑할 많은 것들을 주위에서 막는 바람에 사랑하지 못하곤 합니다.


부디 부탁하건대, 이 글을 읽거나, 이 영화를 본 분들은 자신의 가족(특히 아이들)이나 친지들로부터 그들의 ‘초콜릿’을 막지 마십시오. 아이가 사귀는 이가 편모 편부 슬하라든지, 가난한 집안의 아이라 해서, 별로 마음에 안 드는 차림새며 몸짓을 지녔다 해서 내 기준, 내 미덕을 들이대며 그들을 단죄하지 마십시오. 보이콧하지 마세요. 그는 당신에게나 아이에게나, 당신 친구에게, 심지어 당신의 고을, 당신의 세계에 ‘초콜릿’일지 모르니까요.

신이 준 미각을 썩히지 말고 직접 맛보는 게 어떤가요. 당신 삶이 바뀔지도 모릅니다.



“초콜릿은 마음을 달래주고 낫게 해주죠…….”






*외래어표기법에 따른 chocolate의 바른 표기는 ‘초콜릿’입니다. 그러나 개봉 당시 저 이름으로 상영하였기 때문에 작품명을 고유명사로 간주하여 고치지 않고 이대로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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