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배우는 자가 될 것
일하는 것, 노는 것, 그리고 쉬는 것.
저는 이 세 가지를 구분하라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그대가 몸을 써서 일하든, 외부 대상에 힘을 가하여 변형 또는 유지하는 일을(이때 유지는 자연히 변형하는 걸 막아 원하는 대로 유지시키는 것으로서 사건의 방향을 조작하는 것이어서 실은 변형이긴 합니다) 하건
머리를 쓰고, 마음을 써서 스스로 무얼 해결하려 힘쓰건, 그것이 자신을 유지시키든 변형시키든
아무튼 일하는 것.
일한다는 것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사건의 방향, 힘의 방향으로서 말입니다.
일한다는 건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일 때조차
다른 데, 남에게, 자신을 타자화하여 그 타자인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타자에게 에너지를 보내는 일입니다.
그것을 타자 대신 세계라고 말해도 동일합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일하고 나서
놀이가 필요한가요, 쉼이 필요한가요?
둘 다?
좋습니다. 둘 다 필요하죠.
그러나 논점은 그게 아닙니다.
일이 우리를 살게 해주면 또는 일하느라 바쁜 틈바구니에서도
우리는 잠깐 또는 길게 놉니다.
자주 또는 드물게 놉니다.
놀아 보면, 아, 이 맛에 사는구나. 이게 사는 거구나 하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조건인가 하면 그렇진 않습니다.
당신에겐 쉼이 더 필요합니다.
당신은 쉼이 필요한 때 너무 자주 놉니다.
놀이로 피신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놀이가 그렇진 않고 때로 노느라 못 쉬었는데, 푹 쉰 것처럼
어느 때보다 가뿐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쉰다는 것의 본질은
외부로 돌린 주의를 내부로 돌리는 겁니다.
남이 아니라 나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나를 남처럼 다루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는 법은 무엇일까요.
혹은, 똑같이 내게 에너지를 쓰는 것 같은데 도대체 일함과 쉼의 차이는 무얼까요?
둘은 어떻게 다르죠?
쉼의 본질은 ‘자기 자신이 되는’ 데 있습니다.
스스로가-됨, 스스로로-있음. 이게 쉼의 본질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됩니다.
그리고 이게 특별한 몇몇 놀이를 환기시킵니다.
정확하게는 무슨 놀이냐보다 누구와 하는 놀이냐, 어떤 존재와 어울리느냐가 더 중요하곤 합니다.
어떤 이에게 이는 부처이고
어떤 이에게 이는 특별한 어떤 사람이나, 동일한 사람이라도 다른 조합에 의해 이루어진 특별한 무리와의 만남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에게 무얼 하지 않아도 되는
단지 자기 자신인 것만으로 충분히 상호작용이 되는 그런 만남, 그런 순간에는 노는 것도 쉬는 것처럼
우리를 회복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는 한 발 더 내디뎌 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일함도 나를 더욱 나로 만들어준다면
나를 새롭히고 확장한다면, 나를 더 단단하게 하고 중심과 이어준다면?
그럴 때에 일하는 것이 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것인가.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로 그렇게 할 때, 그렇게 해 주는 만남, 그 만남의 인물이 스승이요 은인입니다.
또 스승이 늘 있어도
은인과 만나고 또 만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때 내가 진실하게 나이지 못한 탓입니다.
내가 나인데, 상대가 나를 더 나로 만들 때
그것을 일컬어 ‘배운다’고 합니다.
배움이 일어나는 겁니다.
배우면 배우기 전과 달라지는데
그렇다고 내가 변질된 게 아니라 더욱 나다워지는 겁니다.
내가 더 확장하는 것이지요.
그대는 일도 하고, 놀기도 하고, 쉬기도 할 겁니다.
너무도 바쁩니다.
그런데 만일 놀면서 쉬고, 일하면서 쉰다면 좋지 않습니까?
배우십시오.
다른 무엇이 되기 전에 우선 언제나
‘배우는 자’가 되십시오.
나무에게
바람이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