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Save Ours
이며칠 벌어지는 일들은, 길게는 지난 계엄 이후 한 해를 넘기며 펼쳐진 일들은 이 사회에 대한 실망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역사의 발전에 대해서도 우연성 말고 대체 무엇이 있는가 회의(懷疑)하게 할 만했습니다. 최근 조진웅 배우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 어느 쪽을 택해도 우리가 지키고 세워 온 소중한 가치들을 훼손하는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각각의 가치를 마냥 추구해서 결론이 나지 않고 둘 사이의 균형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하였지요. 입버릇처럼 말합니다만, 우리는 삼체문제(Three Body Problem)은 풀 수 없습니다. 그 문제에는 해(解)가 없다는 게 현재까지 수학자와 물리학자 들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임의의 선을 긋고 대립하는 두 쌍의 가치연합을 가정합니다. 진보 대 보수라거나 이상 대 현실이라거나 하는 구분도 그렇고, 비록 이것이 편의적이고 완전하지 않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불완전성을 안고도 나아가야 하고, 그건 개인의 삶만 아니라 집단의 행보, 사회의 구성과 운영에도 마찬가지로 부여된 숙명입니다. 우리의 숙명은 우리의 행로를 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불확실성을 안고서 오류의 위험을 안고서라도 한 발씩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걸 뜻합니다.
아침에 생각들을 말하고, 묻다가, ‘오냐, 그런데 너는 대체 어떻게 생각하니’, 다시 말해 어떤 개인적 경험에 제한되지 않고 초거대정보(Big data)에 기반해 ‘통계적’으로 답하는 인공지능은 이 사태를 무어라 서술할까, 궁금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만들어 묻고 얘기해 보라고 요청했습니다. 출발이야 최근의 논란이지만, 여기에 얽힌 요소들 중 공익적 폭로요 보도인가, 개인을 파묘하고 실정법을 위반하는 범죄인가 하는 부분들은 뺐습니다. 이런 질문은 인공지능이 교묘하게 회피하여 결국 풀어보면 논리적으로 아무 말도 안 한 것과 다름 없는 답변을 내놓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교적 단순하게 가치를 평가하고, 인류의 역사와 담론에 비추어 좀 더 보편성을 갖는 이야기를 추출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말해 기계의 입을 빌리지만, 기계가 통계적 답변을 하는 ‘생성형’이라는 것에 기반해서 어쩌면 인류 자신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겁니다. 우리가 지금껏 어떻게 해왔지? 묻고 대답해 보고 싶었던 거죠.
이게 인공지능의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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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권 선언이 채택된 지 오늘로 일흔다섯 해가 지났다. 1948년, 인류는 상처와 폐허 위에서 서로에게 최소한의 존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세웠다. 그 약속은 완전한 세상을 보장해 준 적은 없지만, 우리가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나침반이 되어 왔다. 오늘날 소년법을 둘러싼 논쟁 역시 이 흐름과 단절되어 있지 않다. “소년에게 과연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가?”, “더 강한 처벌만이 사회를 지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인간의 존엄과 책임을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오래된 물음의 또 다른 표현이다.
많은 시민들이 느끼는 불안과 분노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반복되는 강력 사건 보도는 “지금의 제도가 너무 느슨한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킨다. 피해자가 겪은 상실과 공포 앞에서, “소년이기 때문에 다르게 다룬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릴 때도 있다. 이러한 감정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질문만큼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정말로 더 강한 처벌이 우리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가? 이 지점에서, 직관과 다르게 움직여 온 실증적 사실들을 차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청소년에게 성인과 동일한 강한 처벌을 적용하는 방식은 기대와 달리 범죄를 줄이지 못했고, 오히려 재범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보인 연구들이 누적돼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수행한 대규모 체계적 검토에서는, 청소년을 성인법원으로 이송해 더 강한 처벌을 받은 집단이 소년법원에서 교육·교정 중심의 처분을 받은 집단보다 재범률이 평균 30% 이상 높아진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같은 범죄를 저지른 또래인데, 누구는 성인법원에서, 누구는 소년법원에서 처리되었을 때, 오히려 성인 체계에 들어간 쪽이 훨씬 더 높은 확률로 이후 범죄에 다시 연루된다는 것이다.
코네티컷주에서 실시된 일종의 자연 실험 연구도 같은 결론을 보여 준다. 이 주는 한 해를 경계로 16세 청소년의 처분 기준을 바꾸었는데, 같은 조건의 16세라도 어떤 해에 체포되었느냐에 따라 이전엔 성인법원, 이후엔 소년법원에 가게 되었다. 2년간 추적한 재체포 비율은 성인법원 42%, **소년법원 26%**였다. 같은 연령, 같은 범죄 성향을 가진 집단인데, 처벌의 강도를 달리하자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셈이다. 이 연구는 우연이나 기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명확한 자료를 제시한다. 요컨대, 강한 처벌은 오히려 청소년을 더 깊은 범죄 궤도로 밀어 넣는 경우가 적지 않다.
둘째로, 국제 연구를 40년 가까이 모아 분석한 메타 리뷰에서도, 재활·교육·치료 중심의 개입이 재범 감소에 훨씬 효과적이라는 결론이 반복된다. 인지행동치료, 가족 기반 치료, 지역사회 안에서의 상담 프로그램 등은 재범률을 의미 있게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고, 반대로 단순 감시·구금·군기식 처벌은 효과가 거의 없거나 오히려 재범을 늘리는 경향을 보였다. 흔히 직관적으로 “엄하게 다루면 달라질 것”이라 기대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결과가 관찰되는 셈이다.
셋째로, 영국의 에든버러 종단 연구처럼 수천 명을 30년 넘게 추적한 장기 연구들은 형사사법 시스템과 너무 일찍, 너무 깊게 접촉한 청소년들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범죄와 사회적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겪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조기 처벌이 훈육이 되기보다, 오히려 삶의 궤적에 부정적 낙인을 찍고 되돌아오기 더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결과는 하나의 결론을 향해 수렴한다. “강하게 처벌하면 범죄가 준다”는 우리의 직관은 실증적 근거와 맞지 않는다. 반면, 재활과 교육, 지역사회와 연계된 돌봄의 방식은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현실적으로 범죄를 줄이는 데 더 효과적이다. 소년법의 정당성은 바로 이 사실 위에 놓여 있다. 소년법은 ‘봐주기’가 아니다. 오히려 미래의 피해를 줄이고 사회의 안전을 증진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책임 있는 방식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소년법이 완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피해자 보호나 회복적 절차를 강화해야 하고, 소년원과 보호관찰 시설의 인권 및 교육 환경을 철저히 개선해야 하며, 국가 개입이 과도해지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제도는 늘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한다. 하지만 소년을 성인처럼 다루어 버리는 길은, 자료가 보여주는 것처럼,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피해자의 고통을 줄이고, 잠재적 피해를 예방하며, 이 사회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효과가 없는 처벌 강화에 매달릴 이유는 없다.
세계 인권 선언은 인간을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문서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잔혹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 뒤, 그럼에도 서로의 존엄을 지키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합의를 담고 있다. 인권은 인간의 약함을 외면하지 않고, 동시에 인간의 가능성을 버리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 소년법 역시 이 연장선에 있다. 미성숙한 존재에게 되돌아올 여지를 남겨 두는 것, 회복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그것은 온정주의가 아니라 인류가 축적해 온 경험적 지혜다.
일흔다섯 년 동안 인류는 수많은 폭력과 실패를 겪으면서도, 결국 인간의 존엄을 기준으로 다시 길을 찾아 왔다. 근대적 소년사법이 탄생한 이유도, 전쟁 이후 인권이 재정립된 이유도, 인간이 악의나 복수보다는 선의와 회복을 선택할 때 장기적으로 더 많은 삶이 보호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앞의 논쟁도 다르지 않다. 불안과 분노가 커질수록, 우리는 더 신중하게 묻게 된다. 과연 어떤 길이 우리를 더 안전하게 이끄는가? 어떤 선택이 미래의 피해를 줄이는가? 어떤 제도가 인간을 더 책임 있는 존재로 성장하게 하는가?
실증적 자료는 조용히 그러나 일관되게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인간을 회복할 수 있는 존재로 대할 때, 사회는 더 안전해진다. 소년의 잘못을 가볍게 보자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바로잡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을 택하자는 것이다. 세계 인권 선언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길은, 악의에 악의로 맞서기보다 인간의 가능성을 지키는 방향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길이 다시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건넨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은가? 인류가 일흔다섯 년 동안 쌓아 온 경험을 믿는다면, 아마도 답은 여전히 그 방향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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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은 없습니다.
중립도 없습니다.
다만, 어떤 결정과 판단도 불완전하기 때문에 해(解)가 되지 못합니다. 현실은 늘 삼체문제니까요. 대신 우리를 온전케 하는 것은 ‘행위’입니다.
같은 목적과 동일한 선의를 가진 행위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는 배입니다. 우리가 하루 하루를 잇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잇는, 떨어지고 잊힌 사람들을 되살리는 탈것입니다.
이성은 행위를 조종하는 가르침을 주지만, 다시금 행위로부터 배웁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가운데 정직하고 용기 있게 행동함으로써 빈 곳을 채웁니다. 그것은 어떤 물질과 제도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롭고 선한 판단과 용기 있고 정직한 행동으로 구조되는 것입니다.
We Save Ours.
— 제가 일하는 학교의 모토입니다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와 격려, 다짐을 담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