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 내리는 눈에도 — 그러나 시를 믿기 (횔덜린 시로부터)
1975년 출간된 『詩와 哲學』(시와 철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쓴 것을 당시 소광희 교수가 옮기고 박영사에서 펴냈는데 「횔덜린과 릴케의 詩世界」(—시세계)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서언(序言)에서 하이데거가 횔덜린의 미완성 원고를 하나 소개합니다. 거기서부터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시나브로 내리는
눈에도, 저녁식사를
알리는 鐘소리는
제 가락을 잃는다.
(鐘, 종)
이 넉 줄은 본디 횔덜린의 미완성 초고인 《콜롬부스 초고(Entwurf zu Kolomb) IV》에 나옵니다.
Von wegen geringer Dinge
Verstimmt wie vom Schnee war
Die Glocke, womit
Man läutet
Zum Abendessen.
직역하자면,
사소한 것들 때문에
눈처럼 불협화음이 난
저녁 식사를 위해
사람들이 울리는
종처럼.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이데거는 「서언」에서 “이러한 시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설도 아마 그 종 위에 떨어지는 눈에 불과하리라.”(소광희 역)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저는 유감스럽지만 모든 시, 모든 글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다만 이러한 시인(횔덜린이나 릴케 같은 시인들)은 저 종소리와도 같습니다. 그들의 말은 여느 말과 다릅니다. 여느 말이 투박한 데 비해 그들의 말이 얼마나 섬세하고 정확한지 아주 작은 차이로도 영 같을 수 없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건드리면 무너집니다. 흩어집니다. 저 미묘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대로 느껴야지 조작하고 뭐를 부착해선 안 됩니다. 무게 없는 것에 무게를 줄 때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맙니다.
놀랍게도 이는 언어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언어가 가리키는 모든 것에 대하여 언어는 ‘그것이-아님’이라는 관계를 갖습니다. 언어는 자기가 가리키고, 의미가 태어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가리키는 실상과 어긋납니다. 더구나 가리키려는 바가 어떤 깨달음, 어떤 느낌, 고유하고 값진 것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를 “이루 말할 수 없는” “형언(形言)할 수 없는”이라고 합니다만, 그래도 언어는 유일한 탈 것입니다.
가리키고자 하는 위치에 놓이는 순간 그것이 사물이든 언어든, 비언어요 비정형의 무엇이건 간에 그 실상(實相)은 가리키는 언어와 충돌하고 반드시 불일치합니다. 그러나 도로표지판이 적힌 그 장소는 아니지만, 적힌 지명을 보고 가면 그 길 끝에 결국 그 장소에 다다르는 것처럼 언어는 또한 빗나가면서도 옳게 우리를 이끕니다.
이 미끄러짐과 합해짐. 언어의 신비입니다. 누가 언어를 가지고 부리는 마술이 아니라 언어 자체에 내재한 것, 언어가 가진 본성입니다. 언어의 마법성은 언어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아주 멋진 탈 것이나 기계가 있어도 쓸 줄 모르면 깡통이나 짐짝이 되고 마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언어는 고철덩어리나 마찬가지이고, 골치 아픈 쓰레기더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임자를 찾으면 언어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표식에 지나지 않는 주제에 지상과 천상의 모든 것을 아울러 가리킵니다. 실상과 [인식 주체, 수신자인] 우리를 이어주는 유일한 실이라는 점에서는 가리킨다고 말고 차라리 ‘품는다’ ‘가진다’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시인들은 우리와 똑같은 언어를 씁니다. 때때로 문장도 별다를 게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때에 제 말을 쓰기 때문에 제때 제자리에 놓인 그 말들은 봉인을 풀고 마법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그것은 그것이 아닌데도 그것 덕분에 그것에 가 닿습니다.
시를 읽으세요. 해석하지 말고 그대로 읽으세요.
해설로 달아나지 말고 그 미로를 산책하세요.
몸 안에 하나의 기관이 새로 생기듯 시를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장기는 스스로 뛸 줄 압니다. 차차 이해하고 알게 될 것입니다. 억지로 뜯어 고치지도 달리 길들이지도 마십시오. 그대는 시를 믿고, 시를 따르세요.
休
*이 책이 소개하는 횔덜린 시에 대한 하이데거의 원고는 그의 논문집 《횔덜린 시의 해명》(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에서 온 것입니다. 이 책 후반 릴케 시에 대한 해명은 릴케 사망 20주기에 하이데거가 행한 추도 강연의 내용이고, 『숲길(Holzwege)』에 수록된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Wozu Dichter?)」라는 제목의 텍스트가 바로 그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