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나무야

남의 생일상 받기

by 이제월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무척 황당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크리스마스의 풍습들.

대체 왜 남의 생일에 자기들끼리 생일선물을 주고받는 거냐고요!

니콜라우스 성인(산타 클로스) 때문에?

동방박사의 경배와 예물 증정(공현대축일) 때문에?

그것도 다 맞겠지만, 비교적 잘 알려진 이야기들이고, 그건 ‘이유’가 아니라

이유 덕분에 성립한 일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설령 어떤 역사적 연원과 상상이 있었다 할지라도

남의 생일에 자기들이 잔치하는 요상한 일이 어떻게 무람없이 받아들여졌는가, 그 속내가 궁금하지 않은가요?

안 궁금하더래도 말 꺼낸 김에 한 번 따져봅시다.


기독의 성탄절. 무려 그리스도의(Christ) 제사(mas)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생일’을 기념하는 한편 ‘제사’를 드리는 이중의 함의를 띤 날입니다.


그리스도는 순수한 빛, 하늘의 존재, 하느님 자신이니

이 그리스도가 어둠 속에 내려온 것은 크나큰 희생제사를 치른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미사이고,

또 가톨릭이나 정교회 전례에서 모든 미사는 부활하고 승천까지 한 그리스도가 매일 다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내려오는 것이니, 이 육화 또한 제사에 걸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육화[肉化, incarnation, ἔνσαρκος = ἐν (en, “~안에”) + σάρξ (sarx, “육체, 살”) 즉, 살 안에 들어옴, 살이 됨]는 도대체 ‘왜’ 하는 겁니까? 지금은 <왜>가 중요합니다.

무엇인지, 어떻게 그러는지는 각기 믿음의 영역이요, 신비의 영역이니까 이성적 분석은 해도 한 게 아니니까요. 도대체 <왜> 이 육화를, 첫 성탄에 하였고, 날마다 매 미사 때마다 하는 걸까요?


빠니스 안젤리쿠스, Panis Angelicus, 천사의 양식. 종 구분으로서의 천사/인간이 아니라 천사적 영역에서의 양식, 인간 영혼에게도 양식이 됩니다. 성체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미사 중 제대 위에서 사제의 말과 손을 통해 교회의 중재로 성령이 내려와 일으킨다는 ‘성변화’의 결정체, 성체입니다. 그러므로 성체는 밀떡과 포도주이다가 이 ‘형상’(forma) 안에 ‘들어옴’에 의해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됩니다.

우리 육체가 다른 동식물은 물론 광물과도 공유하는 원자 집단에 불과하고, 이는 내 몸일 때나 아닐 때나, 살아서나 죽어서나 똑같지만 내가 숨쉬는 동안 명백하게 그건 그냥 탄소집합, 단백질덩어리가 아니라 그 어떤 ‘나’인 것처럼, 성변화의 결과 평범하던 밀떡과 포도주는 명백히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는 게 저들 신앙인의 믿음입니다.

여기서 그걸 믿느냐, 안 믿느냐는 우리가 따질 바가 아닙니다. 이런 믿음, 생각, 이해, 경험은 다음에 무슨 생각과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느냐가 오늘 관심사입니다.


육화는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게, ‘구원’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 구원의 은총은 선사되는 것,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주려고 무려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 자신인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구체적 살과 피를 지닌 사람이 되어 왔던 겁니다.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 안에 들어왔습니다. 온통 천지가 지저분한데 깨끗한 게 하나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건 더럽혀지기는커녕 주변을 깨끗하게 바꿉니다. 말하자면 구원은 빨래입니다. 빨래를 하려면 깨끗하게 하는 인자가 때와 땟국물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들어가서 촉진시킨 게 아니라 스스로 그 더러운 것이 되어서 그것을 본래 진면목으로 되돌려 놓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에 대하여 하느님이 인간의 모상이 되어서, 그러나 완전한 모형이 되어서 구원에 해당하는 ‘깨끗하여짐’, ‘의화’의 경로를 밟아보임으로써. — 이로부터 사람은 저 ‘사람의 아들’ 예수를 따라하면, 발자취를 따라가면 똑같이 의화될 것입니다.

그리고도 이 자비와 사랑은 마르지 않아서 매일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제사상에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다시 육화합니다. 필멸자를 불멸자로 만들기 위해, 타락자를 순결하고 거룩한 존재로 만들기 위한 이 희생은 결국 ‘양식’을 제공하기 위한 것입니다.

‘먹여 살리’려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예수는 온데간데 없어 보여도, 저희끼리 선물을 주고받다가 문득 머쓱해지더라도, 이제는, 괜찮다는 걸 알 겁니다. 그가 양식이 되어 왔고, 계속 그 희생을 계속하는 한, 생일상을 우리가 받는 건 제법 잘 어울리는 일입니다. 먹이는 사람은, 살리려는 사람은 잘 압니다. 누군가의 어미이고 아비인 사람, 선생이나 목자나 그 무엇으로건 누군가를 살리려 해 본 사람은 압니다. 내가 받고 싶은 선물은 오직 하나 그가 내가 선사하는 생명의 양식을 받아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라는 예수의 생일이 맞지만, 생일상을 예수 아닌 모두가 받는 것도 맞다, 그게 그 사랑의 목적에 부합한다 이 말씀입니다.


사랑받고 마음껏 남의 생일상을 대신 받으세요.

그러다보면, 그 사랑을 먹고 자랑 그대는

다른 이의 생일상을 차려주고 싶을 겁니다.

그대의 생일상으로 다른 이에게 잔치를 베풀고 싶어질 겁니다.


고통과 원망, 미움이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면

사랑도 그렇습니다.

악에 맞서는 길은 더 큰 악이 아니라

단위 자체가 안 맞는

더 순수한 ‘선’입니다.


저질러 버리세요!

우선은 오늘을 마음껏 누리시면서.




나무에게

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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