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첫발을 내딛다
토요일 이른 아침, 몇 주간의 긴 연수를 마치고 안성연수원에서 서울 본점으로 출발하는 은행 버스에 올랐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긴장된 마음으로 거리를 쳐다보았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은행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관계를 맺으니 이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본점 강당에 200여 명이 모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인사부장님으로부터 사령장을 받았다. 내가 발령받은 곳은 서소문지점이었다. 당시 서소문지점은 지점 순위 일곱 번째 지점으로 대형 영업점에 속했다. 연수 기간에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적으라고 할 때 나는 사대문 안의 영업점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한다고 적었고,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사령식을 마치고 영업점에 가서 신고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트렁크를 끌고 본점이 있는 명동에서 지점까지 걸어갔다. 지점은 시청역에서 가까운 법원과 대한항공 본점이 있는 서소문에 있었으며 지점 건물은 한화그룹에 속한 경인에너지 건물이었다. 1층은 건물 로비였고 2층부터 4층까지 은행에서 사용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 은행 지점에 도착하여 청원경찰에게 다가갔다. 이번에 새로 인사발령을 받은 직원이라고 인사드리며 서무계가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청원경찰이 서무책임자(대리)에게 나를 안내하자 반가운 얼굴로 맞아 주셨다. 대리님은 자신의 책상 옆 의자에 앉으라 말하며 내 인사카드를 서류 커버에 넣어 지점장실로 가지고 들어갔다. 잠시 후 서무 대리님의 안내로 지점장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깊숙이 앉아 계시던 지점장님께서 나를 쳐다보면 내게 앉으라 권하셨다. 나는 조심스레 한 칸 건너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서무 여직원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지점장님께서는 인사카드를 찬찬히 살펴보시다가 담배에 불을 붙이셨다. 큰 키에 비해 약간 마른 체형인 지점장님은 담배를 많이 태우는 스타일이었다. 당시에는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시절이었기에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지점장실은 짙은 밤색의 집기와 뿌연 담배 연기로 인해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나는 소파 중간쯤에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시선을 조금 떨어뜨려 지점장님의 찻잔을 조용히 바라보며 지점장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다렸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나의 입술은 바짝 말라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지점장님께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입행을 축하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무심한 듯 말씀하셨다.
"여기는 학교가 아니다. 자기가 맡은 일은 책임감을 가지고 처리해야 한다. 처음이라 서툴겠지만, 선배들이 잘 가르쳐 줄 테니 겁내지 말고 열심히 배워라."
지점장님의 말씀이 끝나고 나는 기어들어 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한 후 지점장실을 나왔다. 얼마나 긴장되었던지 손바닥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나는 긴장하면 손에서 땀이 났다. 지점장님과 면담을 마치고 서무계 빈 의자에 앉아 업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토요일은 오전에만 근무해서 모두가 업무 종료를 위해 분주했다. 은행 셔터가 내려졌지만, 창구 직원들은 시재를 마감하며 더욱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계산 담당 직원들은 각 창구를 돌아다니며 큰 바구니에 전표들을 담아서 자리로 왔다. 한 사람이 거둬들인 전표들을 분류하면 다른 사람들은 분류된 전표를 주판알을 튕기며 열심히 계산했다. 지점장님께서 퇴근하려고 밖으로 나오셨다. 서무계 직원들이 지점장님을 따라 모두 1층으로 내려갔다. 지점장님께서 퇴근하신 후 전 직원을 한자리에 모았다. 서무 차장님께서 전 직원 앞에서 나를 소개하셨다. 소개가 끝난 후 서무계장은 내가 근무할 팀으로 데리고 가서 담당 책임자와 팀원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직원들과 인사를 마치자 여자 탈의실과 식당, 전화교환실 등을 안내했다.
"오늘 많이 피곤했지. 집에 가서 푹 쉬고 월요일에 조금 일찍 출근해."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그제야 조금 긴장이 풀렸다.
"여기는 학교가 아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루하루 업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그 의미를 찾아갈 수 있었다. 은행은 돈을 다루는 곳이다. 작은 사고이든 큰 사고이든 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나만이 아니라 관리를 하지 못한 책임을 줄줄이 질 수밖에 없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가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지점 전체, 아니 내가 속한 은행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임을 명심하라는 의미였음을 나는 일을 하면서 조금씩 배워 가기 시작했다. 다소 무뚝뚝해 보이는 지점장이셨지만 이제 사회의 첫발을 시작하는 후배에게 당신께서 해 주신 말씀은 직장 생활하는 동안 가슴에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