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멘토 K 선배
은행에서 내가 맡은 첫 업무는 <국고 수납> 업무였다. 주변에 법원과 큰 거래기업들이 많아 국고 업무는 단위가 엄청났다. 받은 국고 수납액은 은행용 영수증을 근거로 검은색 두꺼운 회계장부에 수기로 기록했다. 숫자를 잘못 작성할 경우 화이트로 지우는 것이 아니라 두줄을 긋고 그 위에 숫자를 적어야 했다. 나는 장부가 지저분해지지 않도록 기록할 때마다 몇 번씩 숫자를 확인했다. 단위가 크기 때문에 수납 자체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수납한 고지서를 회계장부에 기록하는 일이 나를 더욱 긴장시켰다.
내가 속한 팀은 출납계였다. 지금처럼 창구에 유리로 된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큰 자금이 들고나는 출납과 수납 창구, 그리고 각종 세금을 받는 공과금 창구, 국고 수납 창구로 업무가 구분되어 있었다. 담당 책임자(대리)를 비롯하여 어음교환 담당 직원까지 모두 6명이 근무했다. 평소에는 세금 건수가 적어서 업무를 익히는 데 큰 무리가 없었지만, 월말에는 세금 납기일이 있어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요즘처럼 각종 공과금을 자동이체나 인터넷으로 납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모든 세금을 창구에서 수납했다. 세금은 이른바 똥세, 물세라고 불리던 상하수도 요금, 전화 요금, 전기 요금, 지로 요금은 물론 부가세, 법인세, 재산세, 범칙금 등 종류도 다양하고 세금 용지 또한 크기가 천차만별이었다. 잘못해서 하나라도 분실하거나 '납부 전'과 '납부 후' 금액을 잘못 체크하여 받는 경우에는 금액 차이로 인해 시재가 틀리는 것은 물론 잘못된 금액차이로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나의 멘토 K 선배는 신의 손이었다. 긴 생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그녀는 29살 노처녀였지만, 업무만큼은 완벽에 가까웠다. 글씨는 물론 주판까지 빨라서 그녀가 한번 손을 대면 척척 소리 없이 업무가 깔끔하게 마감되었다. 그녀는 하루 업무의 시작부터 마감까지 일의 순서를 <나만의 노트>에 상세하게 기록하게 했다. 창구에서 매일 사용해야 하는 전산기기 사용법은 자주 발생하는 업무 유형별로 전표에 일일이 프린트하여 노트에 붙여 놓고 업무가 익숙해질 때까지 따라 하도록 했다. 그녀의 이러한 배려 덕분에 3개월이 무사히 지나갔다. 처음 입행했을 때 선배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하루를 잘 버티면 일주일을 버틸 수 있고, 일주일을 잘 버티면 한 달을 버틸 수 있어. 한 달을 잘 버티면 1년을 잘 버틸 수 있고, 그러면서 일이 익숙하게 되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말은 나에게 매일매일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벌어졌다. K 선배는 별단예금(자기앞수표 발행) 담당자로 발령이 났고 새로 온 직원이 내 옆에 앉게 되었다. 본점 홍보실에서 온 그녀는 고참이었지만, 영업점 경험이 없어 창구 업무가 서툴렀다. 거기에 주판까지 사용할 줄 몰라 계산기를 이용하다 보니 실수하는 경우가 잦았다. 매월 돌아오는 월말이었지만, 사건이 발생한 그날은 일 년에 두 번 치르는 재산세 수납 일이었다. 언니는 여행을 떠난다며 조금 일찍 자신의 시재를 마감하고 퇴근했다. 언니가 퇴근한 후 시재를 마감하는데 도대체 어디서 틀렸는지 몇백 원이 차이가 나서 마감이 안되었다. 당일 받은 모든 수납장과 고지서를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재검토하고 여러 사람이 나누어 다시 점검해 보았지만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K 선배가 자신의 업무를 마감하고 지점 전체 마감 숫자가 틀렸다는 말에 퇴근하지 않고 내게로 다가왔다. 밤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아직 문제를 찾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에게 그녀는 내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하나씩 주판으로 다시 점검해 나갔다. 한참 점검하던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찾았다. 나왔어요. 여기 숫자를 잘못 기재했네요. 이제 다 나왔으니 얼른 정리합시다."
그녀는 당황해하는 나를 다독이며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고 마무리까지 도와주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그 당시에는 전화 요금 금액을 계산할 때 3가지(전화요금, 부가세, 합계)로 구분하여 계산해야 했다. 주요 거래처인 D 기업은 월말이 되면 각 부서의 전화요금 용지를 100장씩 묶어서 10개가 넘는 묶음을 봉투에 담아왔다. 전화요금 총액을 당좌수표로 가져오는데 묶음의 금액을 합산하여 확인하고 수표로 결제했다. 받은 수표는 당좌계로 보내어 일반 세금과 국고로 나누어 인수도 처리 후 수납장에 기재했다. 수납한 용지를 세부적으로 합산하여 기재하는 과정에서 업무를 도와주던 직원이 세부 금액을 잘못 기재하여 일반 세금과 국고 금액 사이에 차이가 발생했던 것이다. 은행에서는 가끔 숫자를 잘못 봐서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810원을 180원으로 착각하는 경우 630원의 차이가 발생한다. 일이 꼬이려고 보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근을 서둘렀던 언니가 납부기간이 지난 전화 요금을 <납부 전> 요금으로 잘못 받아 시재 부족금까지 발생했다. 은행에서는 1원이 틀려도 반드시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문제를 찾지 않고 약속이 있다는 핑계와 금액이 적다는 이유로 말도 없이 부족금을 자기 돈으로 메워 버린 것이 문제가 되었다.
나의 멘토 K 선배는 이러한 다양한 사례들을 많이 알고 있어 차분하게 재검토하면서 틀린 부분의 퍼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선배의 도움으로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마쳤다. 선배는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신고식을 톡톡히 했구나. 호된 하루를 보냈어. 수고 많았다. 이런 일은 언제든지 생길 수 있으니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하며 나를 다독여 주었다. 나는 언니와 함께 옷을 갈아입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일을 할 때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서로 얽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고 자신에게 발생한 일을 혼자 은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음도 알게 되었다. 이번 일은 업무를 하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 간의 협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에 업무개선을 위한 프로젝트팀에 참여하면서 새롭게 업무를 설계하는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K 선배의 배려는 내가 은행에 근무하는 동안 혼자가 아닌 동료로서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불편과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