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Teller가 되다
신입 행원 시절, 업무에 익숙해질 때까지 나는 인내하며 기다려야 했다. 아직 업무가 서툴렀기에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일찍 출근하여 업무를 준비하고 조금 늦게 퇴근하면서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나갔다. 그것과 더불어 고객과 직원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친절하게 대했다. 이런 노력들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면서 선배들과 책임자에게 일을 가르치고 싶은 사람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것을 계기로 많은 혜택이 따라왔다.
그 첫 번째 혜택이 바로 계 이동이었다.
점심 식사가 끝나면 나는 3층에 있는 외환계에 자주 갔다. 외환 파트에 있는 언니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업무 성격을 파악했다. 당시 외환계는 일반계에 비해 고객과 직접적으로 부닥치는 일이 적었으며 시간을 조절할 수 있어 직원들이 선호하는 파트였다. 입행 후 첫 연말을 맞이하는 아침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서무 차장님의 전화였다.
"자네 타이핑할 줄 아나?"
"아니요, 할 줄 모릅니다."
"알겠네."
하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그 순간 나는 '아차! 어쩌면 외환계에 갈 기회를 놓쳤구나.' 하는 생각에 온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저녁에 계 이동이 있다며 도장을 들고 5시에 서무 차장님 앞으로 모이라고 했다. 나는 '예금계로 발령 나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외환계로 발령 났다. '타이핑을 못해서 안 되겠다.' 포기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나는 너무 기뻤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외환계는 일반계와 별도로 계 이동을 했다. 외국통화, 수입, 수출, 외화계산 등으로 업무가 구분되었다. 나는 수출업무와 외화계산 업무를 담당했었는데 외화계산 업무는 타이핑이 필요 없었다. 주 업무는 파트별로 발생하는 당일 실적을 사전에 체크하여 대차대조표를 예상하고 환차에 의한 리스크가 발생하지 않도록 본부와 사전 연락하여 포지션을 조작했다. 예상을 잘못할 경우에는 손실이 발생할 수 있으며, 너무 느슨하게 자금을 가져가면 통화 보유에 따른 리스크가 발생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손익과 직결되는 이 작업이 나는 스릴 있고 재밌었다. 매일 발생하는 포지션 조작이 월말에 손익을 얼마나 가져오는지 바로 알 수 있어 매월 말 결산이 가슴 설레는 일로 다가왔다.
두 번째 혜택은 연수 기회였다.
은행은 서비스 직종에 속해 은행별로 친절도를 측정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것은 은행마다 매우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으며 지점 평가에도 반영되었다. 지점에는 매월 모니터 요원이 방문하여 멀리서 직원들의 행동을 체크하거나, 고객으로 가장하여 직접 직원의 업무를 체크하기도 했다. 매월 받게 되는 친절도 평가서에는 우수 직원과 불친절 직원이 통지되었고 창구 직원들은 이에 대해 몹시 신경을 쓰고 있었다. 입행 후 두 번째 12월을 맞이할 즈음 서무 차장님께서 부르셨다. 창구 우수직원 양성교육(Top Teller 연수)에 참여하라 말씀하셨다. 나는 연수를 갈 수 있다는 것에 마냥 기뻤다. 12월 초 일주일간의 연수 참가를 위해 본점으로 갔다. 본점 연수부에서 직원들이 나와 연수에 참여하는 직원들을 확인하고 차량에 탑승시켰다. 연수원에 도착하니 지방에서 온 직원들까지 150여 명이 모였다.
첫째 날, 연수부 부장님께서 연수에 참여한 직원들을 격려하셨다. 그 뒤 연수부 차장이 연수 기간 동안 직원들을 통솔할 대표를 선발하겠다고 했다. 모두 눈을 감으라고 말했다. 모두 눈을 감은 뒤 솔선수범할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라고 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들었다. 잠시 후 모두 눈을 떠도 좋다고 하시며 내게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차장님은 연수생들에게 대표가 된 나를 소개하며 연수 기간에 해야 할 일들을 설명해 주셨다. 우리는 총 3개 반으로 나뉘어 10명씩 한 조로 묶어 교육받았다. 나는 자진해서 대표가 되었기에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여야 했다. 교육이 시작되기 전에 각 방을 돌며 혹시 교육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아픈 사람은 없는지 살폈고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연수 담당자와 교육자 간의 다리가 되었다. 교육과정에는 실습이 포함되어 있어 평가에 통과해야만 탑 텔러(Top Teller)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매일 교육을 마치고 저녁 식사 후에 각 방에서 서로의 자세와 표정을 교정해 주기도 하고 화장실 거울을 보며 자세를 점검하기도 했다.
연수원은 내게 힐링 장소였다. 연수원에 올 때마다 마음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고 동료들과 웃고 떠들면서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어느새 연수 막바지 최종 평가만을 남겨둔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유니폼의 매무새를 체크하고 그동안 실습한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거울을 보고 미소 지었다. 최종 평가를 받기 위해 강당에 모였다. 5명씩 한 조가 되어 강의실에서 평가를 받았다. 다행히도 낙오자 없이 모든 직원이 무사히 평가에 통과되었다. 연수 마지막 날, 나는 교육생을 대표하여 연수부장님으로부터 붉은색의 탑 텔러 명찰을 가슴에 달게 되는 영광을 얻었다. 연수부장님께서는 특별히 이번 교육생들이 질서 정연하게 잘 따라주어 역대 탑 텔러 교육생들에 비해 우수했다고 칭찬하시며 우수 탑 텔러 3명을 선발하여 해당 지점의 서비스 평가를 6개월 면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 지점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신 대로 나는 우수 탑 텔러로 선발되었으며 우리 지점은 6개월 동안 서비스 평가에서 면제되었다. 지점장님은 물론 직원들 모두 기뻐하며 칭찬해 주셨다. 이것을 계기로 다음 인사이동에서 지점장님 추천으로 내가 원하는 부서로 발령받는 혜택까지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