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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구관조 씻기기

by 녹턴

별점: ⭐️⭐️⭐️⭐️

추천대상: 시집에 입문하고픈 분들/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싶으신 분들


오랜만에 시집이다 !!

서점에서 자주 봤었는데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리다가.. 도서관 대출을 통해 읽어봤다. 지금까지 왜 이 책을 택하지 않은 걸까 싶은 의문이 들 정도로 좋은 시가 많았다. 결국 이틀 만에 다 읽었다.


해설을 보지 않고 든 생각은 .. 일단 시가 전부 연보랏빛..? 이라는 거. 분노나 냉소, 행복같은 감정이 많이 드러나지 않고 절제되어 있다. 대신 풍경 묘사나 신비로운 분위기가 담겨있다.


낮은 목소리


계속
눈앞에서 타오르는 푸른 나무만 바라보았다

끌어내리듯 부르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마음이 어려서 신을 믿지 못했다


마지막 ‘마음이 어려서 신을 믿지 못했다’ 이 부분이 너무 좋아서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 항상 시집은 좋게 읽어도 왜 좋은지를 모르겠다. 그래서 더 찾게 된다. 언젠간 알고싶다 ..

모두 잘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이 시집에는 ‘멈춰있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모두 잘 되어 가고 있다’ 속 강의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그저 흐르기를 기다리는 화자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그는 바쁜 일상 속에서는 건질 수 없는, 몇 초간의 찰나를 세밀하게 담아 낸다. 해설을 참고하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덧붙여 생각해 볼 것은 황인찬의 시가 시대의 가장 강력한 항체 역할을 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일 터다.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 이 시대는 무언가를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을 자유는 없다. ‘지나친 긍정성의 사회’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에 따르면 긍정성이 지나치게 과잉될수록 오히려 수동성이 증가한다. 대상의 지배에 완전히 종속되면서 더 빨리, 더 많이, 생산하기에 골몰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사회가 아니라 지독한 생산 사회임을 우리는 이미 안다. 일단 많이 생산해서 많이 팔아야 한다. 멈추면 도태된다. 정지하면 버림받는다. 당연히 이러한 ‘가속화와 활동 과잉’에 빠진 사람들의 시간적 지평은 좁다. 반성과 성찰을 수행할 시간이 없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눈가리개를 한 늙은 경주마처럼 그저 앞으로 달려갈 뿐이다. 연골이 무너지고 굽이 빠질 때까지.

​이런 맥락에서 황인찬의 시가 소중해진다. 황인찬의 시적 주체는 무엇을 해야 할 순간에 ‘무엇인가를 하지 않음’으로써 시간을 정지시키고 시야를 확장하여 대상을 보존한다. 가속이 아니라 정지고 변형이 아니라 보존이다. …(중략) 공백이 만들어 내는 순백의 사유이자 감각. 이를 주목할 만하다는 것이다. -해설-



이외에도 운율이 예쁜 시가 많았다. 어떻게 쓰는 건진 모르겠지만 좋다 .. 참고할 만한 서술도 많아서 좋았다.


“그러나 물이 사방으로 튄다면, 랩이나 비닐 같은 것으로 새장을 감싸 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긴 복도를 벗어나 거리가 젖은 것을 보았다

-구관조 씻기기-



체리를 씹자 과육이 쏟아져 나온다 먹어 본 적 있는 맛이다 이걸 빛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그건 먹어 본 적 없는 맛이다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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