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빈틈을 메우는 증여의 철학본주의의 빈틈을 메우는 증여의 철학
책 후기를 쓰기에 앞서, 책방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소요서가-서울 중구 세운청계상가
큐레이팅이 잘 된 철학서점이다. 제일 잘 보이는 곳에는 대중적인 인문학 서적, 철학 입문 서적이 많이 보였고 한구석에는 철학도들이 좋아할 만한 두꺼운 원서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집도 있어 좋았다. 미학, 페미니즘을 다룬 서적도 여럿 보였다. 철학을 좋아한다면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서점이며, 마음 안으로 파고드는 학문을 좋아한다면 누구나 이 서점이 잘 어울릴 것 같다.
별점: ★★★☆
추천대상: 친구관계, 가족관계에 대해 고민이 많으신 분
요즈음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다가 ‘선물’이라는 단어를 보고 집었던 책이다. 왜 굳이 돈을 주지 않고 그 사람이 좋아할 것 같은 선물을 사서 주는지, 그리고 왜 그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상상 이상으로 행복한지. 초반 몇 페이지를 읽자 이 책이 나의 의문점을 해결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바로 사서 읽어보았다.
내가 산 키링은 어쩌다가 흠이 나도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누군가가 사준 선물이라면,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 것이다. 왜 남이 준 선물을 우리가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일까? 왜냐면 그 선물에는 상대의 마음이 담겨 있으며, 아무런 댓가 없이 준 것이기 때문이다. 계산할 수 없는 효용, 책에선 이것을 증여라고 부른다.
우리는 증여 없이 살아갈 수 없다. 모든 일이 ‘기브 앤 테이크’로 이루어진다면, 모든 세상 사람들은 우울증에 시달리게 될지 모른다. 그런 금전적 거래 뒤에, 인간 대 인간의 감정적인 교류가 있기에 우리가 지금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생기는 알 수 없는 감정, 이것이 증여를 만들어 낸다.
‘교환의 논리는 ‘내준 것’과 ‘받은 것’의 가치가 대등한 주고받기를 지향하고, 서로 빌리고 빌려준 적이 없는 수평적인 관계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교환의 논리는 따르다 보면 타산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죠.
그 때문에 교환의 논리에 따라 사는 인간은 타인을 ‘수단’으로 다루고 맙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는 ‘너를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라는 속마음이 엿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나’는 어디까지나 이익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신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증여가 사라진 세계에는 신뢰관계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중략)
그렇다면 계속 교환적인 인간관계만 쌓아온 사람은 그 뒤에 어떻게 될까요?
주위에 증여를 하는 사람이 없고, 자기 자신 역시 증여의 주체가 아닌 경우, 우리는 매우 간단히 고독해집니다.
-본책 54-55p
앞서 보았던 선물 이외에, 부모님의 사랑도 증여의 일종이다. 나는 어렸을 때 사고 싶은 색칠도구가 많았지만, 부모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왠만하면 사주셨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나에게 무언갈 요구하시지 않으셨다.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주신 증여이다. 아무런 댓가 없이, 그저 상대의 행복을 바라기에 주는 것. 부모님의 증여 덕분에 나도 누군가에게 아낌없이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어른이 되고 난 후, 가끔씩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요 근래 나와 정서적으로 많은 교류를 나눈 친구들이 그 대상이다. 지금 시대와 손편지는 그닥 어울리지 않지만, 여러 이유로 편지는 손으로 쓴다. 우선 내 마음대로 꾸미기 쉬워서 선물까지 다 포장을 하고 나면 나만의 컬렉션을 만든 기분이 든다. 그리고 손편지는 볼펜으로 쓰면 수정할 수 없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쓰는 맛이 있다. 편지를 받고 좋아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마음으로 매년 연하장같이 선물을 꾸리곤 한다.
이런 편지도 증여의 일부일 것이다. 무언가를 받을 거라는 기대를 버리고 그저 주고 싶어서 주는 작은 선물. 이런 증여는 합리적인 인간은 하지 않을 짓이다. 그 어떤 고전 경제학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소중하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요즘 사람이 이해타산적으로 변했다고 해도 아직 증여는 살아있다. 인간이 계속 살아있는 한, 증여를 받은 이들이 누군가에게 계속 증여를 주는 한, 증여는 인간이 풀지 못할 변수로 영영 남아있지 않을까.
모든 증여는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어쩌다 먼저 받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걸 건네야만 한다.’
전달자는 그런 사명을 짊어집니다.
그러니 ‘살아가는 의미’, ‘일의 보람’같은 금전적인 대가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은 전부 전달자가 되었을 때 증여의 수신처에서 역방향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후략)
-본책 264p~26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