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

by 녹턴

별점: ★★★★★

추천 대상: 허무함을 글로 승화시키고 싶은 사람/ 최근 이별이나 상실을 겪었은 사람


오랜만에 내 내면과 결이 맞닿아 있는 시집을 찾았다. 어떤 상황에 체념하여 잔잔하게 슬픔을 읊조리고 있는 모습에서 내가 보였다.


트램펄린

그런 것들이다 내가 아쉬운 건
트램펄린에 오를 때
나는 이미 처지가 정해져 있었고
그걸 누구에게 묻지는 못했고

트램펄린 밖으로 떨어진 소년
최선을 다해서 태연하고 최선을 다해서 일어서는 소년

그런 것들이다 언제나
어른들은 타협하고 소년들은 트램펄린에서 떨어지고

그런 것들이다 내가 아쉬운 건
하지만
트램펄린에 오를 때
이미 준비된 실패라는 걸 알았고
예정된 마지막 장면을 후회하지도 않았고

그냥 트램펄린이란 트램펄린은 모두 불태워졌으면 좋겠다
자꾸 오르게 되니까
또 최선을 다해 떨어질 테니까
떨어질 처지라는 걸 아니까

트램펄린에 날 던지면서 말했다
“말해줘 가능하다면 내가 세상을 고르고 싶어”

생각이 있으면 말해주리라 믿었지만
트램펄린은 그냥
나를 떨어뜨리고
미워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떨어뜨리고
그러면 내 처지도 최선을 다해 떨어지고

세상에서 트램펄린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아쉽다
날아오르는 몇 초가 달콤했기 때문에


나에게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해 생각하는 때가 있다. 나의 높지도 작지도 않은 키, 부모님이 매달 주시는 용돈의 액수,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 내가 태어나서 자랄 때까지 받았던 그 모든 보살핌. 이 모든 게 모여서 내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잘못일까. 나의 의지도 실은 운명의 것이었다면 어쩌지?

이 시가 딱 그런 내용이었다. 이미 모든 과거가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극히 소수라고 느낀다. 그래서 결국 떨어질 거라는 걸 예감하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지는 않다. 트램펄린에서 날아오르는 몇 초가 달콤하듯이 말이다.



‘빼다 박은 아이 따위 꿈꾸지 않기. 소식에 놀라지 않기. 어쨌든 거룩해지지 않기. 상대의 문장 속에서 죽지 않기.’
‘잘 생각해. 너는 중독되면 안 돼. 중독되면 누가 더 오래 살까? 이런 거 걱정해야 하잖아. 뻔해. 우리보다 융자받은 집이 더 오래 남을 텐데.’

화자는 타오르다 ‘식어버리는’ 데 주목한다. 올라갔을 때의 행복보다도 내려오는 실패를 더 크게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애인에게 불타오르지 말자고 권유한다. 말투는 귀여웠지만, 내용은 별로 귀엽지 않은 달콤 쌉쌀한 시였다.


그렇게 시를 지킨다 우리 나이엔 근육량을 늘려야 한다느니 저금리 시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느니 이번 인사가 어땠고 누구 줄을 타야 한다느니……
이런 소식에서 멀어지기 위해/ 나를 소식에서 떼어놓기 위해 나는 오늘도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등지고 있는 화자이다. 나도 가끔 현실적인 얘기만 하면 목이 막힐 때가 있다. 마치 소화가 안 되듯이, 굳이 이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은 때가 온다. 이미 충분히 느끼고 있는 주제여서, 더 이야기 해보았자 마음만 불편할 걸 알아서. 그리고 더 성스러운 무언가를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어딘가로부터 밀려 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소수의 길을 걷는 화자이자 작가가 존경스러워졌다고나 할까.


하얀색 표지처럼 시가 하얗다. 시에서 화자는 상황에 맞서 반대하는 액션을 취하기보단, 그 상황을 가만히 바라보며 우리에게 읊조린다. 허연의 시는 어떤 색도 물들여지지 않은, 가장 조용한 슬픔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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