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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도스토옙스키-악령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군중

by 녹턴

별점: ★★★★

추천대상: 재밌는 장편 소설을 도전해보고 싶은 분(총 분량이 1500p정도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유명하진 않지만 좋은 작품을 읽어보고 싶은 분


요한의 묵시룩 중, 악령은 인간에게서 빠져나와 돼지로 향한다. 악령에 씌인 돼지 떼는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 소설에서도 위 장면에서처럼, 등장인물들이 무엇에 홀린 듯 미쳐 날뛰며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책을 고른 이유는 단순하다. 전에 읽은 시지프 신화에서 이 작품의 인물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완벽히 이해하고 싶었기애 바로 빌려서 읽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내가 커서 꼭 다시 한 번 읽게 될 소설이이 될 것 같다. 첫번째로는 어려워서, 두번째로는 그럼에도 재밌어서이다. 인물 이름부터가 난관이었다. 마리야 티모페예브나 레뱌드키나, 마리야 이그나티예브나 샤토바…… 모든 러시아 문학의 특징이다. 옆에 메모장에다가 인물의 이름, 가계도를 기록해두면 이해하기가 좀 더 수월하다. 주연들의 장광설도 난관에 한몫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는 대체 불가능한 매력이 있다. 우선 인물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외모, 재산 등 모든 걸 가졌지만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린 니콜라이 스타브로긴. 그런 니콜라이를 질투하고 추앙하며 자신의 야욕을 위해 온갖 파렴치한 일들을 저지르는 악역 표트르 베르호벤스키. 허무주의에 빠져 자살할 날만을 기다리는 알렉세이 키릴로프까지. 이 세 주역은 서로를 이용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비극을 이끈다. 어떤 드라마, 애니메이션에서도 보지 못한 인물상을 이런 고전에서 보게 된다. 이런 재미가 내가 고전을 읽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400쪽짜리 3권에 달하는 분량을 읽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되고 정치소설을 좋아한다면 읽는걸 추천한다. 다만 그럴 여유가 없고 정치물에 관심이 없다면 그리 추천하지는 않는다. 쉽게 빠지게 해주는 친절한 소설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1권은 학교 숙제하듯이 읽었고, 본격적인 스토리가 진행되는 2권부터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1권은 인물을 소개하는데 책의 반절을 허비하지만 2권과 3권에서는 수많은 사건이 터지고 등장인물이 속절없이 죽어나간다. 정신을 차리면 이야기는 어느새 끝에 다다른다.




각각의 등장인물을 분석해보았다. 아래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우선 표트르 베르호벤스키. 보통 후기글을 보면 니콜라이와 키릴로프에 대해 얘기하는데, 나는 이 인물의 캐릭터가 더 흥미진진했다. 표트르는 ‘어중간하게’ 머리가 잘 굴러가는 야심가이다. 왜 어중간하냐 하면, 그가 이 소설에서 거의 모든 일을 우발적으로 만들어내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가 5인조의 프론트맨이다. 자신의 이익을 목적으로 혁명단을 만든 후 니콜라이에게 신이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그를 자꾸 찾아가고 이용하며 주변인을 휘말리게 한다. 말 그대로 악동같은 행보를 보인다. 그의 부도덕함과 애매한 야망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판을 계산하며 잔머리를 굴리는 그의 찌질한 모습이 재미있었다. 특히 그가 도지사 렘브케의 아내에게 접근해, 도지사를 골리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도를 대표해 현명한 모습을 보여야 할 도지사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그에겐 질투 많은 아저씨의 모습만 남아있었다.


니콜라이 스타브로긴은 아주 고약하다. 자존심이 아주 높고, 자신의 능력을 믿는다. 그 능력으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일종의 실험을 한다. 입에도 담지 못할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겐 어떤 속죄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실상을 갖고 있지만 그는 등장인물들 대부분의 총애를 받는다. 우선 표트르는 그에게 동경을 넘어선 사랑을 표한다. 그는 애초에 니콜라이를 1인자로 만들려고 했었다. 샤토프도 그를 신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인다. 아름다운 여인인 리자를 생각해서 그녀를 니콜라이에게 양보한 (불쌍한) 약혼자 마브리키의 행적만 보아도, 그는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독백을 보면, 니콜라이 자신의 내면은 텅 비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병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충동에 사로잡힌다. 지금도 난 그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키릴로프는 카뮈가 비판했던, ‘자살’을 선택한 인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은 필수 불가결하고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신은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부조리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믿으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간다. 키릴로프는 자신이 죽음으로서 신이 되고, 사람들에게 자기의 자살로 깨달음을 주려는 것이다. 여기서 카뮈의 말을 빌려 그를 비판하고자 한다. 삶-죽음 이 대립쌍이 부조리 자체이다. 그래서 그는 자살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부조리를 피해 한 대립항만 선택하려는 것이지, 부조리를 대면하는 방법이 아니다. 이 부조리를 자각하고, 그럼에도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라고 카뮈는 말한다. 그렇기에 키릴로프는 죽어서 신이 되지 못한다. 해설서를 인용하자면, 그는 죽어서 신이 아닌 시체가 되었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가 신을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신은 믿을 겁니다. 하지만 자기가 신을 믿는다는 것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당신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63p


“나는 물론 자살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나도 가끔 어떤 상상을 (……) 만약 악행을 저지르거나 무엇보다도 부끄러운 짓, 즉 치욕스러운 짓을, 단 몹시 비열할뿐더러…… 웃긴 짓을 저지른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천년 동안 기억하고 천년 동안 침을 뱉을까 싶은데,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관자놀이에 한 방만 쏘면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때는 사람들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들이 천년 동안 침을 뱉는다고 한들 무슨 상관입니까?”
키릴로프 대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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