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서
별점: ★★★
추천대상: 평소 질문이 많지만 입 밖으로는 잘 내지 않는 분/ 도스토옙스키의 단편을 읽어보고 싶은 분
분량이 짧아서 머릿속에 많은 내용이 남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의 특별함과 주인공의 독백이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주인공은 오랫동안 관리로 일하다가, 친척에게서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고 지하 골방에 틀어박혀 살게 된다. 이 곳에서 그는 삶에 대한 허심탄회한 독백을 우리에게 건넨다. 그는 세상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찬 회의주의자이지만, 절대 그의 의견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나름 세상을 개혁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지녔고, 똑똑한 사색가이지만 그냥 그 생각을 지닌 채 골방에 틀어박혀 나가지를 않는다. 방구석 히키코모리 같기도 하고.. 비운의 지식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미 세상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예컨대 인간을 낡은 습관으로부터 떼어 놓고 과학과 상식의 요구에 맞게 인간의 의지를 교정하고자 한다. 하지만 인간을 개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무슨 근거로 인간의 욕망을 그렇게 교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런 교정이 정말로 인간에게 이익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기왕지사 말이 나온 김에 죄다 말하자면, 이성의 추론과 대수학에 의해 보장된 진짜 이익, 정상적인 이익에 역행하지 않는 것이 정말로 늘 인간에게 이롭고 전 인류를 위한 법칙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확신하는가? 실상 이것은 아직은 한낱 여러분의 가정에 불과하다. 설령 이것이 논리의 법칙이라 할지라도, 인류의 법칙은 절대 아닐 수 있다.'
-그의 독백 중에서
이 대목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과학과 이성은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온 것인가. 애초에 이익은 인간의 행복에 있어 바람직한 것인가? 과학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 소외된 자들을 위한 얄팍한 방편 역시 인간의 이기심에서 도래된 것이 아닌가? 기술의 발전은 물론 단기적으로 보았을 땐 좋은 것이지만, 그런 발전을 향유할 수 있는 제한된 영역과 그 영역의 설정으로 인한 분쟁, 그 분쟁을 이용하는 매스컴 등등.. 그 기술을 만든 이의 목적이 의심될 정도로 기술 발전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누군가의 희생, 비윤리적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아주 짧은, 너무나 작을 자신의 이득을 놓치고 싶지 않은 이들 때문에 오늘도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
그의 이 독백은 요즘 나오는 자율주행 기술이나, 인공지능 기술 분야에서도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논점이다. 기술을 만드는 입장만이 이 점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기술을 사용하는, 소비하는 입장도 기술의 목적, 의의에 대해 깊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지금 시대에 '사용 설명서'는 의미가 없어졌다. 어떤 기술을 주던, 결과물은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의 윤리관, 준법의식에 달려 있다. 가짜뉴스로 형성된 악성 정치팬덤도 이런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다시 소설 얘기로 돌아오자. 1800년대에 나온 소설인데, 어째 현재 우리와 고민의 내용이 별반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되는 능력은 그래서 중요하다. 질문을 잘 사용하면 상황을 바라보는 시야 자체가 달라지고, 이는 사고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 독백 외에도 그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지나가는 아름다움이나 명예의 허무함이라던지.. 인간은 이성의 탈을 쓴 동물일 뿐이라고 하는 등 날카로운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진다. 이는 다소 불쾌하지만 그만큼 중요하다.
'나도 동의하지만, 인간은 무엇보다도 무언가를 창조하는 동물로서 의식적으로 목표를 향해 질주하고 공학에 종사할, 즉 어디를 가든 영원히, 끊임없이 자기 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는 이따금씩 갑자기 엉뚱한 쪽으로 빠지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독백 중에서
이것이 1부의 내용이었고, 2부는 그의 개인적인 일화를 담았다. 여기서는 주인공의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이 심하게 나타난다. 심리 서술을 어떻게 한 걸까 싶을 정도로 생생하고 불쾌하다. 남들에게서 온갖 모욕을 당하고 자기보다 약한 인간은 조종하고 싶어하는 등, 인간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모든 인간을 폄하하면서도 자기 자신 또한 그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인간 본성에 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어 흥미로운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