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청 노무담 16

저는 사업주가 아닙니다

by 박감

대형 상가 빌딩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시설관리직원이 연차수당(연차 미사용수당)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근로자는 상가번영회장을 상대로 신고를 했다. 번영회는 아파트로 치면 입주자대표회의 같은 조직으로, 전체 상가의 시설관리 업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번영회에서는 외주 관리업체가 저를 고용했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번영회가 건물 시설관리를 외주 업체에 위탁했거든요. 하지만 저는 사실 번영회가 고용한 직원이에요. 웃긴 건, 월급도 번영회 통장에서 나왔고요. 외주 관리업체는 번영회장의 서명 없이는 한 푼도 쓸 수 없어요. 결국 번영회장이 연차수당을 주지 말라고 지시한 거죠. 외주 업체는 무슨 힘이 있겠어요?”


근로자의 말을 들어보니 사업주가 누구인지 매우 애매했다. 근로계약은 외주 관리업체와 체결했으니, 형식상으로는 외주 업체 소속이 맞았다. 하지만 급여는 번영회의 통장에서 입금되고 있었다.

번영회장과 외주 관리업체 대표를 함께 불렀다. 먼저 번영회장이 자신만만하게 중앙노동위원회 재심 판정서를 내밀었다.


“보세요, 저는 사업주가 아닙니다. 중노위에서 이미 판정받았어요. 3년 전에도 시설관리 직원이 저를 상대로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냈었는데, 제가 사업주가 아니라고 판정이 났습니다.”


노동위원회는 행정부에 속해 있긴 하지만, 일종의 노동 법원 역할을 하는 독립 기관이다. 특히 중앙노동위원회는 지방노동위원회의 판정에 불복한 당사자가 재심을 청구하면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위 있는 기관이다. 판정서를 읽어보니, 확실히 번영회장이 설명한 그대로였다. 사업주는 외주 관리업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때, 외주 관리업체 대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번영회가 저희 업체에 지급하는 관리용역비는 월 20만 원도 안 됩니다. 근로자가 받을 연차수당은 200만 원인데요. 저희 돈으로 이걸 어떻게 주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번영회 통장을 저희가 관리하는 건 맞지만, 번영회장의 서명 없이는 한 푼도 못 쓰거든요. 번영회장이 근로자한테 조금만 더 근무해달라고 사정했는데, 그걸 안 들어주고 퇴사했다고 승인을 안 해주는 거에요.”


그는 신문 기사에 나온 법원 판례도 들고 왔다. 입주자대표회의가 시설관리 직원의 사업주로 판결난 사례가 있지 않냐며 강조했다. 하지만 번영회장도 만만치 않았다.


“감독관님, 저건 다른 사례예요. 우리 번영회에 대한 판정서가 있잖아요? 처벌이 필요하면 외주 업체를 처벌해 주세요. 그들이 돈을 먼저 지급하고, 나중에 민사소송으로 우리한테 청구하면 되잖아요. 민사 판결 나면 천천히 줄게요.”


말문이 막혔다. 근로자가 돈을 받지 못했는데, 누구도 사업주가 아니라며 돈을 주지 않으려 하다니! 중앙노동위원회의 판정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외주 관리업체만 처벌하면 번영회장은 다음번에도 같은 일을 반복할 게 뻔했다.

그때, 근로기준법의 ‘임금 지급 연대책임’ 조항이 떠올랐다. 도급인(이 사건 번영회)의 귀책 사유로 수급인(이 사건 외주 관리업체)이 근로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면, 도급인과 수급인이 둘 다 책임을 진다는 규정이었다. 주로 하도급이 많이 이루어지는 건설 현장의 임금 체불 사건에서, 하청 업체에 공사대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은 원청 업체에도 임금 체불 책임을 함께 묻기 위해 많이 적용되는 조항이다. 하지만 위탁사업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시정지시 공문을 양쪽에 보냈다. 외주 관리업체가 근로자를 직접 고용한 사업주는 맞지만, 번영회도 임금 지급에 연대책임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잠시 후, 번영회장이 전화로 항의했지만, 조용하고 단호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미지급하면 두 분 모두 처벌받게 됩니다.”


결국 번영회장이 하루 만에 연차수당 지급을 승인했고, 다행히도 근로자는 연차수당을 모두 받을 수 있었다.

사건 처리 중에는 늘 긴장과 스트레스가 마음속을 꽉 채우지만, 사건이 해결되면 그만큼의 쾌감이 몰려온다. 근로자의 억울함이 풀렸겠구나 하는 안도감과, 오늘 ‘밥값은 했다’라는 뿌듯함이 동시에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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