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리 Nov 29. 2021

도쿄올림픽

2021년 여름, 빼앗긴 올림픽

완연한 개인주의자가 됐다고 착각할 무렵, 헌법을 보고 눈물 흘리는 감수성에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매번 열광하던 올림픽에 어째서, 왜, 흥미가 없었던 걸까? 답은 연애다.




좋아하던 누나의 소개로 초여름 소개팅을 했다.



문화생활이라고는 달에 한편 남짓 보는 영화가 전부(이것마저 코로나19로 넷플릭스가 대체했고)였던 터라 홍대 소규모 공연장에서 보잔 말이 상당히 부담됐다. 고리타분한 모습을 들키기 딱 쉬웠다. 걱정이야 좀 됐지만 막연히 홍대를 동경했기에 간단히 공연이나 보고 오자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무례하다.



처음 만난 그는 일요일임에도 업무 전화를 받으며 옆으로 쓱 지나갔다. 직감으로 '저 사람이다!'란 생각이 들었고, 맥주 한잔 하고 공연 보고 집에 가면 적당한 주말을 즐길 수 있겠다 싶었다(다시 생각해도 상당히 무례하다). 언론인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휴일에도 일을 할 수 있구나 싶었고, 그렇다 하더라도 소개팅 장소에서까지 일을 하고 있었던 그를 안타까워했다.



내 마음과 달리 맥주를 마시기 시작한 그는 공연 전후로 맥주를 4잔이나 마셨다. 전혀 새로운 느낌의 소개팅이었다. 몇 보 양보해서 맥주 4잔이야 그렇다 치고, 맥주 안주로 치즈를 주문하면 자기는 채식주의자라고 핀잔을 주는 식이었다(시킬 때 말하던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싫어서 그랬던 건 아니고, 그냥 그러하다는 정보를 준 것뿐이었다는데 의도와는 달리 그도 나를 일요일 요깃거리(?)로 생각하나 싶었다. 나도 맥주 3잔은 마셨겠다, 요깃거리라면 좀 더 매운맛을 보여줘야겠단 생각에 거침없이 묻고, 답했다. 집에 가는 길에 담배 피우냐고, 자기는 피는데 내가 안 피면 안 피겠다고 묻는 말에 아, 이번 소개팅도 망했구나 싶었다(근데 좋아서 물었단다).



맥주가 문제였다. 8호선을 타야 했기에 홍대에서 시청 방향 2호선을 타고 잠실로 가야 최단거리지만, 신도림 산다는 말에 하행선에 발을 딛고 말았다. 멋쩍어서 "10분밖에 차이 안 나요. ^^"도 보태면서(찌질하다). 지하철에서 자기는 가방에 잡다한 것들이 많다며 이것저것 보여주더니 필름 카메라를 꺼냈다. 필름 카메라는 좋아하는 누나(주선자)가 2년 전에 보여줬었기에 그렇게 오랜만에 보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신기하다고(예의상), 오랜만에 본다고(반쯤 거짓말). 뭐 이것저것 말하는 찰나에 갑자기 셔터가 찰칵, 후레쉬가 번쩍, 사진 찍혔다. '아, 이 사람이... 취했구나, 근데 날 싫어하진 않는 거 같다. 아, 어쩌지.' 홍대에서 신도림은 금방이라 다행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무슨 메시지를 그렇게 나눴는지 아침에 후회했다(무례하다, 미안해).



회사 앞 모니터에 앉아 어제를 생각하며 선톡은 하지 않겠다 다짐했는데, 아니 그날따라 왜 그렇게 일은 없고 시간은 안 가는지.... 연락해볼까? 잠깐 생각했다가 아니, 정신 차리자 했다가, 먼저 카톡 오면 답장 안 해야지 했다가 그러다 2시쯤에 '종수씨 월요일 어때요'라는 선톡에 아 왜 그날따라 일은 없는지 10분 동안 고민하다 결국 답했다. 답을 시작으로 별별 이야기를 다 하고, 금요일에 보자는 약속까지 하고, 금요일엔 말 편하게 하자고, 내가 오빠지 않느냐고 너스레 떨다 결국 사귀었다. 글이야 급한 전개지만, 아 얼마나 깊은 역사랴....



정신없이 사귈 무렵, 지금 생각하면 분명 6월이라 생각했는데 2020으로 위장한 도쿄올림픽이 7월에 있었나 보다. 다른 때 같으면 금메달 소식에 열광하고, 아쉬운 경기에 안타까워하고, 아마도(?) 도쿄에서 한 올림픽이라 편파판정일 거라며 심판을 욕했을 테다. 그런데, 올림픽이 삭제됐다. 단 한 경기도 보질 않았다. 그래서 난 완연한 개인주의자가 됐을 거라 생각하며 아... 이런 변화는 애인 때문인가 아니면 그간 읽어왔던 책들의 영향인가 자가 검열에 한창일 때, 야근 중 읽은 헌법 11조에 울컥, 헌법 37조에 다시 한번 울컥, 그래 그럼 그렇지. 뼛속 깊은 집단주의자가 멀리 있지 않았다.



연애 때문이다. 연애하느라 올림픽마저 잊었던 거다. 무려 올림픽을 잊은 거다. 내가 80살까지 살면, 너무 어려 기억 못 하는 시절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15번 남짓 볼 올림픽 중 하나를 그냥 보냈다. 다 연애 때문이다. 지금의 애인과 2024년을 보낸다면 또 올림픽을 놓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마도 걔는 개인주의자여서 올림픽에는 관심 없을 테니까, 좋아하는 사람 따라 잘 변하는 나도 개인주의자가 될 테니까.



헌법 11조(평등)와 37조(자유)는 그나마 아나키스트를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듯하다(법도 이념도 잘 모른다). 어쩌면(?) 이미 개인주의화가 진행되고 있을지 모를 내가 영 싫진 않다. 올림픽 잃고 뭐라도 얻겠지(등가교환의 법칙).



걔는 나를 "여름"이라고 잠정 결론 내린 듯하다(그렇게 부르진 않는다, 여름에 만나서 여름이란다). 서로에게 얽매지 말자는 이유로 나는 애칭을 안 짓겠다 했지만, 부를게 아닐 애칭이라면 나는 그냥 "올림픽"으로 할 거다. 어차피 부르지 않을 거라 세 글자여도 상관없고, 내게서 올림픽을 빼앗았으니 올림픽을 걔한테 봉인하면 된다(등가교환의 법칙). 잘 해보자 올림픽~



이게 유난했던 올 여름을 마치며 하는 생각이다.

작가의 이전글 코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