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오던 날

너의 시간 속으로 2화

by 다별

건널목 저편에서 누가 손을 흔든다. 선우였다. 하늘색 비옷을 입은 그를 알아보자마자, 서연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지만 이내 웃음기를 지우려 애써본다. 선우가 단숨에 횡단보도를 건너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새침한 얼굴을 하려고.


"하아... 후우... 서연아 미안해. 오다가 일이 좀 있었어."


"......"


저 멀리 선우의 얼굴이 보였을 때 반가웠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갑자기 대꾸조차 하기 싫은 서운함이 가득 밀려들었다.


'야! 김선우! 네가 무조건 나오라매? 그래놓고 비오는 날 나를 이렇게 세워두는 게 말이 돼? 전화는 뒀다 뭐하는데?'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게 왠지 구질구질하게 느껴져 그냥 입을 꼬옥 다물고 있었다.


'그래, 뭐... 내가 네 여자친구도 아니고... 내가 비를 맞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었나보지.'


서연은 생각할수록 자꾸 삐딱하게 화가 나는 자기자신이 싫었다. 이 상태로 입을 열었다간 선우한테 마음을 들킬 것 같아서 그녀는 더 꼬옥 입술을 깨물었다.


"서연아, 화 풀어. 늦어서 정말 미안해. 내가 오늘 아님 안된다고, 무조건 나오라고 그래놓고선... 비오는데 여기 서있느라 너 많이 춥고 힘들었겠다. 그래도 한번만 봐주라 응?"


하며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는 선우. 마음이 조금 풀어진 듯 선우에게 눈길을 준 순간, 서연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우의 손에 난 심한 상처, 그리고 뚝뚝 떨어지는 피!


"서, 선우야! 너 피! 너 손이 왜 이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너 괜찮아? 다른 데도 다친 거 아니야?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어디 봐봐."


갑자기 눈물이 그렁해져서는 속사포처럼 걱정 섞인 말을 쏟아내는 서연을 보며, 선우는 안심이 되는지 빙그레 웃었다.


"아, 이거 별 거 아니야. 오다가 어디 좀 부딪쳐서 그래. 하나도 안아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를 쓱 닦는다.


"너는 지금 웃음이 나니? 안되겠다. 일단 어디 들어가서 응급처치라도 좀 하자. 약국이...? 아! 저기 있다."


서연은 선우의 팔을 잡아끌고 약국으로 들어갔다. 소독약과 거즈를 사고 약사의 도움을 받아 선우에게 응급처치를 해준 후에야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 그런데 약국 안이 아늑해서였는지, 갑자기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다.


"선우야, 나... 비 맞으면서 좀 떨었더니 오늘은 그냥 좀 쉬고 싶네. 너도 다쳤고. 너 나랑 어딜 가려는 거였는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가면 안될까?"


선우는, 하얗다 못해 창백해진 서연의 얼굴을 보고 또 다시 미안해진다. 그래도, 쉽게 포기가 안된다.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오늘이 아니면 안되는데...'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서연아, 정말 미안한데 우리 카페 같은 데 가서 따뜻한 거 마시면서 일단 좀 쉴까? 그러다 보면 괜찮아질 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힘들면 어쩔 수 없지만. 오늘 꼭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대체 그게 뭔데? 너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궁금한 게 많았지만 서연은 일단 끄덕인다. 아무리 봄비라지만 이 비를 맞으며 어딜 가는 건 안내켜도, 선우랑 함께 있는 건 싫지 않으니까. 아니, 그러고 싶으니까.


멀지 않은 곳에 통유리창이 크게 나있는 카페가 있었다. 둘은 창밖이 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기로 서로 눈짓을 하고 비옷을 벗고 마주 앉았다.

비옷을 벗자, 그레이 니트 스웨터를 입은 서연의 어깨가 선우의 눈에 들어온다. 가오리핏이라 실루엣이 다 가려질 법도 한데, 오히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부각돼보여서 선우는 순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서연아, 좀 어때? 아직도 춥니? 내 카디건이라도 걸치고 있을래?"


"아니. 괜찮아. 따뜻한 거 마시니까 좀 낫네."


'뭔가 해줄 수 있게 기회를 좀 주지.'


서연의 말에 내심 아쉬우면서도 어색한 마음을 들킬 세라, 선우는 일부러 활짝 웃어보인다. 희고 가지런한 치아가, 마치 치약 광고 모델 같다.


'아 진짜... 저렇게 좀 웃지 말지. 너 이럴 때마다 나 정말 헷갈려. 나한테만 이렇게 웃어주는 건가 싶어서. 정말 미치겠다구!'


그럴 리 없겠지만 그랬으면 좋겠다고 서연은 생각한다.


***

"하아..하아.. 나 힘들어. 대체 어디까지 가야 돼?"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돼."


두 시간 후, 둘은 물안개 자욱한 강가를 따라 그렇게 어디론가 계속 걷고 있었다.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