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그늘, 말 못하는 선율

너의 시간 속으로 3화

by 다별

"힘들면 잠깐 쉬었다 갈까?"

"그래."

선우는 성큼성큼 몇 걸음 앞서 가더니, 강가에 앉을 만한 곳을 찾아 얼른 손수건을 꺼내 깔아준다.

"서연아, 여기 앉아서 좀 쉬어."

그리고는 미리 준비했다는 듯, 배낭에서 초코바를 꺼내 서연에게 내민다.

"이런 건 언제 준비했어?"

대답 대신 씨익 웃어보이는 선우... 그 해사한 얼굴에 서연은 또 마음 속으로 도리질을 친다.

***
"선배! 선배? 괜찮아요?"

준겸이 연이어 부르는 소리에 서연은 자다 놀라 깬 사람처럼 반사적으로 입을 연다.

"어? 어.. 그래.. 괜찮아. 우리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음식 나왔으니까 일단 우리...밥부터 먹어요."

"그래, 그러자. 여기 맛있어. 많이 먹어."

"네."

준겸은 그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 지 막막했다. 먹으면서 생각해야지... 그 마음으로 묵묵히 상에 놓인 애꿎은 반찬들만 보면서 수저를 바삐 움직인다.

그러다가 문득, 서연이 먹는 모습을 바라본다.

'참 예쁘게도 먹네. 이젠 가끔씩 이렇게 밥 사달라고 해서 이렇게 마주앉을 일도 없겠네.'

서연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틈을 타 이 모습을 눈에 한껏 담아가려는 듯, 준겸은 그윽한 눈길로, 그러나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본다.

***

'어? 이게 여기 있었네?'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짐정리에 한창이었던 준겸이 발견한 건, 바로 라흐마니노프 음반이었다.

여행엽서나 빛바랜 사진들, 그 외 -잡동사니 같아도 절대 버릴 수는 없는- 소소한 것들을 담아둔 일명 '추억상자'의 먼지를 털고 뚜껑을 열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을 걸어오는 물건...

CD건 LP건 따로 잘 보이는 곳에 줄맞춰 정리해놓는 준겸이기에, 상자 속에서 음반이 나온다는 건 스스로도, 아니 그 누가 봐도 의외였다. 그러니 자기가 넣어넣고도 잊어버린 것이다.

그랬다. 그렇게 잊어버리고 싶었다. 이사 갈 때나 열어볼까 말까한 데 넣어서 그렇게 덮어놓으면, 눈앞에서 안보이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니 완전히는 아니어도 선우의 존재를 이만큼 잊고 살 수 있었던 거겠지... 머릿속에 그 생각이 스치자 준겸은 쓴웃음을 짓는다.


***

"어때? 입맛에 맞았니?"


"네. 정말 한동안은 한식 생각 안날 것 같아요. 진수성찬에, 떡갈비도 맛있고..."


"다행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아까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도 수습해야겠고 서연이 했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준겸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하다.


"저...선배. 아직 시간 좀 있으시면 우리 자리 옮길까요? 커피는 제가 살게요."


"그래, 그러자. 나 오늘은 좀 여유 있어. 우리 회사 바로 뒤에, 내가 좋아하는 카페가 있는데 거기 갈래?"


준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빌딩숲 뒷골목에 이런 데도 있었네?'


흰 벽돌건물.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은은하게 들리는 첼로 선율.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Vocalise)>였다. 원래 가사가 없는 성악곡으로 쓰여진 이 곡이 마치 말못하는 선율로 서연의 주변을 맴도는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이 준겸의 머릿속을 아프게 스쳐간다.


서연이 여길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투박한 듯 보이는 회벽이 군데군데 놓인 초록식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통유리창에서 들어오는 한줄기 햇살이 빈티지 테이블과 의자 위를 비추고 있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광선의 변화를, 찰나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고 했었지.'


준겸은 너무 밝은 곳보다는 구석에 아늑해보이는 2인 테이블에 눈길이 갔다.


"우리 저기 앉을까요?"


"그래."


커피가 나오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준겸은 갑자기 긴장이 된다.


"저...선배."


"준겸아."


"앗! 먼저 말씀하세요."


"아니야. 너부터 얘기해봐."


"......"


"......"


자리를 옮긴다고 없어질 어색함이 아니었다. 그렇게 쉬운 얘기였으면 그 긴 세월 동안 마음에 묻어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쉽게 꺼낼 수 있는 거였다면 선우형이 유서처럼 남기고 간 음반을 추억상자 안에 꽁꽁 가둬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서연과 마주앉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걸 알면서도 끝까지 내적갈등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게 과연 잘하는 일일까? 아니, 내가 말을 끝까지 할 수나 있을까?'


준겸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길고 긴 아마존강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거슬러올라가보려는 무모한 시도처럼 느껴졌다.


'꼭 다 알 필요가 있을까? 꼭 다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흐르는대로 두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