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시간 속으로 6화
"준겸! 여기야 여기! 짜아식! 안본 새 더 멋있어졌는데? 그동안 잘 지냈냐?"
"와아... 형! 이게 얼마만이에요? 먼저 연락을 다 주시고! 취업 준비로 바쁘신 거 아니었어요?"
"나, 취직했어. 첫출근까진 몇 주 남았지만. 그냥 그동안 바쁘다고 너 맛있는 거 한번 못사준 게 미안해서."
"네에."
준겸은 그 말에 미소로 대답했지만 직감적으로 선우가 그래서 보자고 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은... 너한테 부탁할 것도 하나 있고 해서."
그러면서, 무언가를 내미는데 중고 LP 샵에서 샀을 법한 오래된 음반이다.
"라흐마니노프네요."
"응. 이거 서연이가 전부터 갖고싶어 하던 음반인데 내가 어렵게 구했거든. 서연이 생일날 깜짝 선물로 준비했는데 이거 그 때까지 네가 좀 맡아줄래?"
"엇.. 이걸 제가 왜?"
"이유는 묻지 말고 그냥 그렇게 좀 해줘. 내가 그 전에 찾으러 올게."
"네에..,.."
"그리고 혹시 말이야. 나한테 연락이 없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서연이한테 이걸 좀 전해줄래?"
"제가요? 형! 혹시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어디 가실 일이라도?"
"아니, 그냥. 그 때쯤에 혹시 신입사원 연수 잡히면 내가 생일날 못줄 것 같아서 그래."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이 미심쩍으면서도 준겸은 헤어지며 음반을 받아들었다. 그게 선우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
"선배!"
"그래, 얘기해."
서연은, 전에 없이 굳어있는 준겸의 표정을 살피면서 조용히 기다린다. 동아리에서 노래 잘하고 성격 좋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준겸이었다. 이 친구를 떠올리면 무엇보다도 서글서글한 미소가 항상 생각이 났는데...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너무도 낯설기만 하다.
"이거 그때 바로 못드려서 죄송하다는 얘기하려고 온 건 맞지만... 사실, 선우형 그렇게 사라진 후, 선배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를 생각하면 영원히 전해주고 싶지 않았어요."
정말 그랬다. 준겸의 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서연의 삶은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끝이 안보이는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어두웠기 때문이다.
"선우형이 죽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잖아요. 차라리 죽었다면 선배가 5년씩이나 애달파하며 형의 그림자를 안고 살진 않았겠죠.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형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예요. 그리고 저한테 그렇게 찾아온 걸 보면 분명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길 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 하루아침에 선배를 혼자 남겨두고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그러면서도 선배한테 아무 말도 안한 거라구요! 그게 용서가 돼요?"
서연의 눈에 금방 눈물이 가득 고인다.
"선배가 넋나간 사람처럼 형을 찾아헤맬 땐, 이 음반이 마치 선우형이라도 되는 듯 끌어안고 더 울까봐 줄 수가 없었어요. 선배가 드디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할 땐, 더 꺼내지 말아야겠다 생각했구요. 선배가 얼마나 빛나는 사람인데 다시 선우형의 망령으로 어두워질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
"그래, 알았어. 준겸아. 이제 그만해. 나 다 알아들었다구... 그리고 이제라도 전해줘서 고맙고 너 절대 원망 안해. 나 생각해줘서 그런 거잖아. 이런 거 받았다고 해서 나 또 비틀대고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거 너도 알잖아.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마음 편히 유학 가. 가서 건강하게 잘지내고 예쁜 여자친구도 사귀고. 너야말로 선우한테 빚진 기분이었는지 뭔지, 그래서 힘들 때마다 내 옆에 있어주느라 애썼는데 이젠 거기서 완전히 벗어났으면 좋겠다."
준겸은 감정이 격앙된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선배 정말 다 알아들은 거 맞아요? 아까 제가 한 말이 장난 같아요? 정말 모르는 거예요? 아님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거예요? 저 선배 많이 좋아해요. 사랑한다구요!"
서연도 모르진 않았다. 술에 취해 비틀거릴 때,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릴 때, 혼자서는 어쩌지 못할 위기의 순간마다, 그때마다 준겸이 곁에 있었다.
'우연히 거기 있었겠지. 내가 가여워서 그러겠지. 이러다 말겠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선우가 떠난 후, 준겸이 지켜봐주고 곁에 있어준 그 세월은 그의 마음을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서연은 애써 그 마음을 외면했다. 받아줄 수 없는 마음을 아는 척해 좋을 게 뭐란 말인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를 것 같으면 그 자리를 재빨리 모면하거나, 애써 농담으로 준겸의 입을 막았다. 그러다보면 그도 서서히 지쳐서 자연스럽게 그녀를 떠날 거라고 믿으면서...
"선배. 저 최근 1년 동안 일부러 선배랑 거리를 뒀던 거 아세요? 그럼 선배가 혹시라도 내 빈자리를 느끼지 않을까... 선배를 좀 안보고 살면 내 마음을 접을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더라구요."
서연은 미안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그냥 나를 맘껏 미워해. 그렇게 해서 네 맘이 편해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더이상은 나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고."
"제가... 선배를요? 와... 최서연 씨! 진짜 나쁘네...
근데 아무리 해도 난 최서연 당신을 미워할 수가 없어. 미워지지가 않아."
서연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말할게요. 선우형이 선배 곁에 있었던 시간보다 더 긴 세월 동안, 선배 곁엔 내가 있었는데... 곁에 있어줄 수 없는 순간에도 내 신경은 온통 당신한테 가있었는데...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어서 한번만이라도 내 품에 안아보고 싶었는데... 정말 단 한번도 틈을 주지 않더라? 대체 김선우가 뭔데... 얼마나 대단하길래... 당신 마음 속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는 건지..."
준겸은, 힘없이 쓴웃음을 짓는다.
"나 그래도, 선배 포기 안해요. 내일모레 유학 떠나지만. 단 한번만이라도, 후배라고, 어리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서른 살 남자로 생각해봐주면 안돼요? 당장 대답하라는 거 아니에요. 저 학기 마치고 한국 들어올 때, 그 때까지 생각해봐주세요."
"......"
고개 숙인 서연의 눈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툭 떨어진다. 준겸은 서연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며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저 가요, 선배. 그래도 악수 한번은 해줄 거죠?"
준겸이 일어나자, 서연은 같이 일어나 힘없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준겸은 악수를 할 듯 서연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확 끌어당겨 서연을 잠시 품에 안는다. 반응할 기운도 없어서 그냥 몇 초 가만히 그대로 있었지만... 서연은 은은한 향과 함께 따뜻함을 느꼈다.
"이 느낌, 기억해요 꼭!"
그렇게 서연에게 속삭이듯 말하고 준겸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 문을 나선다.
***
준겸이 나간 후, 10분 넘게 넋이 나간 듯 그대로 앉아있다가... 서연은 사무실로 돌아가 몸이 안좋아 병원을 가야겠다며 급히 반차를 낸다. 누가 봐도 창백한 얼굴에 아무도 그녀가 아픈 걸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지고 기절한 듯 몇 시간을 잤을까? 서연은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아까 준겸에게 받아온 라흐마니노프 음반이 불현듯 생각났다. 책상 위 스탠드를 켜고 그 위에 올려놓았던 낡은 앨범자켓에서 조심스레 LP를 꺼내는데 작은 종이가 툭! 바닥으로 떨어진다.
한 귀퉁이에 스케이트보드가 그려져 있는 메모지에, 무언가 적혀있었다. 선우의 글씨다.
16 rue Brézin
75014 Paris
'주소 같은데, 이건 뭘까?'
***6화 bgm***
《Vocalise》 - Rachmanino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