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다양한 인간 군상 중 하나
한번 물꼬를 틀고 보니 그는 엄청난 수다쟁이였다. 딱히 편견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남자도 이 정도로 말이 많구나 여겨질 만큼. 한 번은 여자 과장들이 있는 자리에서 본인의 소개팅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누가 들어도 상대방은 차장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 끝까지 부끄럼이 많아서, 수줍어서 본인을 거절했다며 어떻게 다시 연락할지 고민이라며 사뭇 진지한 내색이었다. 연애사업에 참 취약한 사람이구나, 그래서 결혼을 못 했나 하는 생각을 조용히 갈무리하는데, 노련한 여자 과장들은 웃으며 N 차장을 비호했다. “아가씨가 너무 부끄러웠나 보다~ 내가 조금만 젊었어봐 당장 N 차장님 만나는데 호호호호, 아쉽다니까.”
역시 사회생활 만렙을 달성한 그녀들 다웠는데, 문제는 그 말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차장에게 있었다. 그런 칭찬은 민망하다며 겸손 되이 손사래를 쳤는데 서로 북 치고 장구 치며 하하 호호하는 분위기에 나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빈말이라도 그가 그 말을 믿을까 봐 비슷한 말이라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사회생활이라면, 난 끝까지 적응하고 싶지 않다고 여기며.
이런 비슷한 에피소드가 참 많았다. 옆자리 직원이 회식 후에 집에 가는 전철 안에서 제가 차장님을 참 좋아하는 거 아시죠?라고 했단다. 누가 보아도 (인간적으로)라는 말이 숨겨진 대화였을 텐데, 어쩜 그 직원은 지하철 안에서 모두가 듣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냐며 내게 연신 소곤거렸다. 주책이었다. 원하는 대답을 끝까지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나도 비뚤어졌는지 한번 말하면 그만인 것을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뭐가 그리 중요한 이야기라고, 아침 보고를 하는 나에게 곤란한 듯이 주절주절. 내가 알기로 그 여직원은 남자친구도 있고,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혼자 김칫국을 마신 듯했다. 참, 회사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다.
그렇게 업무에도 적응한, 평화로운 어느 날이었다. 이제는 보고에도 익숙해지고, 차장의 농담 따먹기에 너스레도 떠는 평범한 중견 직원으로 착실히 적응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차장이 조금씩 선을 넘기 시작했다. 거리를 좁혀온 것이다. 보고하러 N 차장을 찾아갔더니,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자고 카페로 앞서 성큼 걸어갔다. 커피를 사서 회사로 들어올 줄 알았더니, 카페에 아예 앉으며, 보고는 무슨 보고냐며 이야기나 하자고 했다. 딱히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카페에서 한 30분은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이런 시간들이 점점 늘어갔다. 업무 관련 대화도 아닌,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왜 노총각 차장과 카페에서, 그것도 업무시간에 단둘이 앉아 시간을 보낸 단 말인가.
나는 조금씩 그가 불편해졌다. 담당 차장이니 무작정 피할 수도 없었고, 커피를 들고 가거나 마셨다고 한두 번은 거절하기도 했다. 직원들과 무리를 지어 사무실에 간 적도 있는데, 눈치는 또 빠른 사람이라 나를 쳐다보며 보란 듯이 입을 삐쭉 내밀기도 했다. 이거 뭐 회사에서 비밀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혹시나 내가 오해할 여지를 주었나 생각해 봐도 그럴 건덕지 조차 없었다. 더구나 나는, 잔잔한 연애를 하느라 행복해 있었는데, 말 많은 회사라 비밀로 하고 있는 걸 몇 번이나 오픈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다. 다른 부서에 차장이 새로 전입했는데, 예전에 프로젝트를 같이하며 나와 일면식이 있었다. 지나가다 대화를 하는데, 나에게 본인 부서로 같이 근무할 생각이 있냐며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다. 민원업무에서 이동을 한지 몇 달이긴 했으나 다른 부서는 근무여건이 훨씬 좋았다. 사실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솔깃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고, 나는 이 내용을 일단 N 차장과 공유했다. 보고를 해야 한다고 여겼고, 이동을 혹시나 하게 되더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런데, N 차장의 반응이 이상했다. 업무적으로 불편함을 이야기하지 않고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하필이면 그 차장도 노총각이었는데, “그 차장이 이번에 XX동에 집을 샀던데 그래서 그러냐? 그 차장이 총각인데 땡땡씨랑 무슨 사이여서 끌어주는 거 아니냐, 나이에 비해 머리가 안 빠져서 젊어 보여서 그러냐, 언제 몰래 만나서 둘이 이런 대화를 한 거냐” 하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무슨 생각을 저 양반은 하고 있는 걸까. 어쭙잖은 수다를 내세우며 커피를 마시자고 하더니, 속마음은 아주 시꺼먼 구렁이였다. 밖에서 보면 지나가는 아저씨에 불과한 당신을. 너무 놀라고 당황스럽다 보니 그날 하루는 유야무야 지나갔는데, 퇴근 후 스스로 다짐했다. 제대로 말을 해야 한다고. E 부장과 F 차장을 겪으며 속앓이 한 나는, 이제 이런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되어 있었고, 그 사실이 참 어이없기도, 속상하기도 했지만 나의 입장을 분명하게, 빠르게 전하고 상황 정리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 너무 화가 나기도 했다. 댈 사람에게나 시도해야지. 내가 만만하게 보였나. 나를 뭘로 보고. 대화를 받아주니 본인도 받아줄 거라 혼자 망상을 했나.
다음날, 사무실에서 보고를 하는데 또 카페에 가자고 했다. 내가 우스워 보였는지. 사무실에 나오자마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차장님은 어제 선을 넘었다고. 부서 이동을 상사에게 보고하는 직원에게 다른 상사와의 이성적 관계를 추궁하고, 집을 산 알지도 못하는 말을 하고, 어제 기분이 너무 나빴고 불쾌했으며 차장님이 사과해야 한다고.
그는 깜짝 놀라며 눈을 연신 좌우로 왔다 갔다 하더니 미안하다고 사죄를 했다. 사무실로 이만 가보겠다고 하고 자리를 비켰는데, 그에게 장문의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너무 미안하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나는 이미 내 불쾌한 마음을 표현했고, 사과를 받았으니 이제 그만 신경을 끄고 싶었다. 나의 소중한 시간을 굳이 아무나 에게 쓰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다음날 또 보고를 하는데, 사무실에서 그가 주저리주저리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너무 미안하고, 본인 자리에 인사부서 규정이 있는데 찾아보니 본인이 말한 내용이 직장 내 괴롭히기에 해당될 수도 있겠다며, 어쩌고 저쩌고… 정말 사과마저도 말이 많고 그의 간장 종지 마냥 그릇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 불에 데인 사람처럼 행동하나 싶었는데, 그는 인사부서 직원 출신이었다. 징계를 받을까 두려웠나. 나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더 이상 이 주제로 그와 연결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