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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너리 Oct 11. 2023

14-3. N 차장_까면 깔수록 양파 같은

참 다양하고, 참 재미있다

그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장문의 문자였는데, 너무 길어서 한 화면에 담기지 않았다. 입말투를 그대로 옮겨 적다시피 해서 읽다 보면 N 차장의 목소리가 귀에서 들리는 착각이 들었다. 본인도 선을 넘은 걸 자각했겠거니 싶었고, 같은 회사를 다니는 이상 오며 가며 얼굴을 마주칠 텐데 더 이상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실 노골적인 성추행이나 몇몇 상사의 성희롱에 비할바가 못되었으니까. 굳이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처음에는 예의상 문자에 회신을 했는데, 웬걸 회신에 대한 답문자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어진 문자가 더 장문이었고, 문자 진동이 오면 괜히 놀래곤 했다. 제발 오지 말아라 했지만,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 더 이상 회신 할 말도 없었다. 이만하면 답장을 안 해도 되겠다 여겼는데, 그의 문자는 계속 이어졌고, 그다음 날 출근길에서도 문자를 받았다. 그는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폭주기관차 같았다. 

이 지경에 다다르자, 나는 또 다른 직속 차장인 L 차장에게 조언을 구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같은 직원에게 보여주기에는 혹시나 소문이 퍼질까 염려되기도 했고, 올바른 도움을 받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인사부서에 바로 이야기하자니 내가 문제를 확대시키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 반, N 차장이 인사부서 출신이라 유야무야 정리되지 않을까 하는 혼자만의 판단에 망설여지기도 했다. 

문자 내용을 보여주니 L 차장은 놀랜 눈치였고, 조심스럽게 나에게 N 차장의 문자가 불편하다는 내용을, 단호하게, 명확하게 전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문자에 대해서 불편하다고 말하지 않았고, 어떻게든 대화를 빨리 끝낼 구실만 찾았으니까. 그래서, 그녀의 조언대로 지속적인 문자가 불편하다고, 그만 보냈으면 한다고 간결하게 적어 보냈다. 그리고 더 이상 문자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으로 끝났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이메일이 오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이메일은 주요 업무 도구인데, 편의상 알림이 자동 설정되어 이메일을 수신하면 상단에 제목과 함께 팝업창이 생긴다. 혹시나 놓칠 수 있기에, 직관적으로 눈에 띈다. 한창 업무 중에 N 차장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는데, 제목이 구구절절 문자처럼 길었다. 혹시나 업무 관련일까 싶어 확인해 보았는데, 문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장문의 긴 이메일이었고 나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이상한, 본인 세상 속의 이야기를 잔뜩 열거했길래, 무시했다. 

그런데 또 메일이 왔다. 이번엔 메일을 열람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메일이 발신 취소가 되었고, 다시 같은 제목으로 또 수신 알람이 떴다. 내 모니터에는 팝업창 3개가 표시되었다. 그래도 읽지 않으니 다시 팝업창이 표시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내가 메일을 읽을 때까지 메일을 보냈다가 발신 취소를 했다가 다시 보냈다가를 반복하는 거였다. 계속 알람이 떠서 안 열어 볼 수 없게. 

차장이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싶었고, 앞에서는 말 못 하고 뒤에서 이메일로 장난치는 차장의 이중적 태도에 소름이 끼쳤다. 더구나 이메일을 보내기 전에 그는 팀장에게 보고를 하러 사무실에 들렀고, 나는 인사를 했었다. 그는 내가 사무실 자리에 있는지 확인까지 하고, 이메일을 보내고 있는 거다. 이렇게까지 공들여 수작업으로 괴롭히다니, 좀 무서웠다. 

나는 혼자 해결하기는 힘들겠다는 판단이 섰다. 옆 직원과 내용을 공유하며 화장실 갈 때도 같이 다녔고, 점심시간에도 차장에게 보고하러 갈 때도 혼자 가지 않았다. 철저히 둘만 사무실에 남겨지는 상황을 피했다. 눈치가 있어서 인지, 보는 눈을 의식해서인지 사무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업무 대화 이외의 주제는 꺼내지 않았다. 간혹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내 목소리가 다른 직원에게 들리도록 거절했다. 그는 종종 팀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내가 있는 사무실에 찾아왔는데, 은근슬쩍 내 자리에 와서 무엇을 하는지 쳐다보기도 했고, 팀원들에게 간식을 사며 땡땡씨가 고생해서 사 왔다고 어필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그는 분명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사랑싸움을 하고 있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한숨이 나왔다. 미혼의 여성이 대화를 들어주고, 가끔 웃어준다고 본인에게 이성적 관심이 있는 건 전혀 아니다. 그저 사회생활의 일환일 뿐인데 우습게도 착각하는 상대가 있다. 혹자는 그랬다. 상사에게, 특히 나이가 어중간한 남자상사에게 웃어주면 안 된다고. 오해하기 십상이라고. 사람이고 감정이 있는데, 웃는 것조차 상대방을 의식해서 웃지도 못한다니. 일말의 여지가 될 행동 하나에도 조심하라는 말인데, 그 작은 행동에도 어깨가 들썩하며 작은 희망을 가진다고 생각하니 애처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실상은, 애처롭기보다는 징그럽고, 어이가 없다 여기다가도 무섭다. 

 


다행히도, 절묘한 타이밍으로 N 차장이 팀장으로 승진했다. 몇 년째 승진에 물먹고 좌절했다고 들었는데 이번 해에는 뜻을 이룬 것이다. 상사의 승진은 대게 무감각한 편인데, N 차장의 승진은 진심으로 기뻤다. 왜냐하면, 그가 이동을 하니까. 그의 승진이 결정되기 전에, 그를 피해 부서이동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도 이동을 하다 보니, 다른 부서에서 새로운 업무를 배운다는 생각은 빛 좋은 개살구 같았다. 업무에 적응하는 것도 예전처럼 흥미롭게 생각되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 그의 승진은,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다. 

승진 축하 회식에서 나는, 보는 이가 많은 테이블에서 가볍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고생하셨다고, 축하드린다고. 그에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지사로 출근하는 그의 마지막 날,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하자며 문자를 하는 차장을 거절했다. 그놈의 커피. 들을 말도 없었고, 단둘이 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내 주변을 계속 서성거렸지만 나는 눈길을 주지 않았고, 그렇게 그는 이 지사를 떠났다. 한 번씩 옆 직원을 통해 그의 근황을 전해 듣기는 들었는데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가끔은 이 지사로 방문을 하기도 했는데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를 하고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고, 나는 승진시험에 떨어졌다. 어찌 알게 되었는지 그에게서 문자 한 통을 받았는데, 다음번에 잘 보면 된다는 심심한 위로의 메시지였다. 나는 그 문자에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주 뒤, 어디서 승진시험 때 내가 행사준비로 고군분투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전후사정을 모르고 문자 해 미안하다며, 본인이 있었다면 공부할 시간을 할애해 주었을 텐데 아쉽다고, 너무 결과에 신경 쓰지 말라는 애정 어린 문자를 다시 받았다. 나는 그 문자에도 답하지 않았다. 

 


N 차장은 까면 깔수록 양파 같은, 매력이 넘치는 상사였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얕게 알게 되면 허물없는 모습에 인간적인 상사로 여겨지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까면 깔수록 짓물러진 양파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 아름다운, 조금 알아서 오히려 더 괜찮은 사무실에 이상적인 상사지만, 자세히 다가가서는 되려 가시에 찔려버린다. 이 회사에 꽤 오래 근무했다고 여겼고 많은 상사들과 일을 했다고 자부했지만, 또 처음 보는 유형의 상사를 만났다. 하늘 아래 같은 사람은 없다지만, 참 다양하고, 참 재미있다. 

짓물러진 양파가 참 진절머리 나다가도, 그래도 또 그 나름의 매력이 있지 않은가. 입을 가만히 있지 않고 조용할 줄 모르는, 그래도 이상하게 막 밉지는 않은, 얄팍한 수가 눈에 보여 떼어내기도 참 애매한. 그래서인가,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 하면 못할 법은 없을 거다. 사랑이란 감정은 참 오묘해서, 또 누군가는 그의 숨겨진 면모를 사랑스러워할지 누가 아는가. 취향은 분명 존재하니까.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 나는 이제는 그의 문자에 가볍게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N 팀장이 된 그, 새로운 사무실에서는 그의 진면목의 일부만 보여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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