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나하벤 BUNNAHABHAIN
병을 열자마자 사과 향이 잔을 뚫고 나온다. 잘 익은 달달한 사과향. 향은 분명히 묵직하고 꿀처럼 질감이 무거워서 겨울 같은 향인데, 입에 닿는 맛은 경쾌하고 가벼운 여름 같다. 포근한 담요와 약간 흐린 하늘이 조금 질린다 싶을 때쯤, 여름이 그리워지는 그런 맛. 겨우내 듣던 cigarette after sex를 플레이리스트에서 조금 덜어내고 산뜻한 보사노바를 틀어 부나하벤과 함께 여름을 기다린다.
부나하벤을 따라내면 처음엔 가벼운 사과향으로 시작해 점차 캐러멜과 바닐라가 올라오고, 약간의 포도향도 가미되어 과실 향이 기분 좋게 난다. 하지만 조금만 더 열어두면 향이 점점 더 묵직하고 두꺼워지고 꿀 향이 질감 있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캐러멜 향이 모든 것을 감싸 안아 버번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반면 혀에 느껴지는 건 경쾌한 시트러스. 가볍고 달뜨는 과일 맛이다. 향에서 느껴진 두께감이 무색하게도 높은 톤의 목소리처럼 얇게 느껴진다. 목 뒤로 넘기고 나면 마지막엔 기분 좋은 나무향이 남는데, 피트 향이 아닌 생나무에서 날 법한, 그런 날 것의 나무향이 난다. (이대로 향수병에 담아 내 몸에 바를 뻔했다.)
부나하벤 증류소는 스코틀랜드 내 아일레이 증류소들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다. 바닷가에 면해 있지만, 섬의 주 항구로부터는 조금 거리가 있다. 아일레이에는 퇴적된 이탄이 많아 제각기 성격은 달라도 주로 피트 향이 강하게 나는 위스키를 만드는 증류소들이 많은데, 부나하벤만큼은 피트 향을 강점으로 삼지 않는다. 부나하벤의 코어 라인들은 피트 향을 전혀 담지 않은 위스키들로, 몰팅 시 피트 향을 입히지 않을뿐더러, 섬 내 유일하게 순수하게 강으로부터 얻는 샘물로만 위스키를 담기 때문이다. 그 샘물 덕에 맛은 산뜻해지고, 향은 부드러워진다. 부나하벤은 워트 숙성 시 오레곤 나무로 만든 숙성고를 사용해 피트 향 대신 기분 좋은 나무향이 배어든다. 피트 향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지만, 숙성 년수가 낮은 라가불린과는 또 다른 생나무 향을 즐길 수 있어서 만족스럽다.
사과향에 달큰하게 취하고 싶다면, 향으로는 겨울을 보내며 맛으로는 여름을 조금 서둘러 만나고 싶다면, 부나하벤을 추천한다.
Bunnahabhain
부나하벤은 스코틀랜드 아일레이 섬에 있는 증류소로, 위에서 언급했듯 대부분의 아일레이 증류소들이 몰팅 시 피트 향을 입혀 피트감을 강조하는 반면, 주요 라인에서 피트감을 부각하지 않는다. 반면, 샘물의 깔끔한 맛과 나무 숙성고의 맛을 살려 지역적 특색과는 전혀 색다른 위스키들을 선보인다. 12년 숙성 싱글몰트의 경우 셰리 캐스크와 버번 캐스크에서 숙성을 진행해서 과실 맛과 캐러멜 맛이 지배적이다. 가격이 전반적으로 접근성이 좋아 가볍고 달달한 스카치위스키를 구매하고 싶다면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