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란지교]
내가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가장 크게 깨우칠 때는 얼굴에 닿는 바람이 날카롭지 않고 보드라워질 때, 그리고 내가 집어 드는 술이 달라질 때이다. 겨울엔 조금 더 무겁고 두터운 맛을 찾는다면, 봄이 다가올수록 산뜻하고 경쾌한 맛을 찾게 된다. 굳이 예를 들어보자면 겨우내 피트 위스키와 바디감이 묵직한 와인만을 고집하다가 갑자기 살짝 가벼운, 과실감이 좀 있는 오렌지 와인이나 피노누아 쪽을 뒤적거리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포근해지는 온도때문일는지, 주변에 조금씩 움트는 초록빛에 설레어서 인지는 모르겠다. 평상 시라면 신맛이라면 혀에 닿자마자 몸을 움찔거릴 나지만, 괜히 마음이 설레고 산미가 있는 술을 찾는다. 여름이 되면 한동안 손이 가지 않던 샴페인을 집어 들겠지. 나는 그렇게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계절의 변화를 체감한다.
지금 이 시기, 경쾌한 그 산미를 느끼고 싶어 집어 든 건 지란지교 탁주다. 지란지교는 산뜻한 산미가 도드라지는 기분 좋은 탁주로, 매실과 청포도 같은 과실맛과 가벼운 요거트 맛이 기분 좋게 혀를 감싸는 술이다. 향에서는 호두기름이나 엿기름 같은, 그 중간 어디 즈음의 기름진 향과 시트러스 하고 상쾌한 과실향이 어우러진다. 한 잔 가볍게 마셨을 때, 적당한 산미가 입맛을 돋우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을 상상하게 만든다. 다른 어떤 음식을 곁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 설레는 산뜻함을 즐기고 싶어지는 맛이다.
막걸리가 그 어느 때보다 유행하고 있는 요즘, 시중에는 수많은 탁주들이 쏟아져 나와 선택의 폭도 많이 넓어져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시장을 점령하고 있는 막걸리들은 일본식 국이 섞인, 개량누룩과 감미료 등이 첨가된 경우가 대부분이고, 전통 방식을 고수해나가는 막걸리들은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입할 만큼 물량을 공급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물론 개량누룩을 쓰는 막걸리들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난 여전히 파전집에서 먹는 장수 생막걸리의 맛을 사랑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지켜온 전통의 후광을 차치하고서라도 그 맑고 개별적인, 집집마다의 빚은 누룩의 특징이 살아 있는 매력이 좀 더 끌린다.
주변에 이런 맛을 공유하고자 추천이라도 할라치면, 무슨 막걸리가 이렇게 비싸나는 반발에 부딪히고는 한다. 그럴 때 난 그저 말없이 한 잔 따라준다. 맛을 보면 다들, 이건 그래도 맛있네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맛보기 전까지는 알기 어려운 가치가 있다. “막걸리가 막걸리지”라는 말이 싫었다. 그 안에 들어가는 정성과 좋은 재료, 가치가 무시당하는 게 싫었다. 버거도 5천 원짜리 맥도널드도 좋고 만원 짜리 브루클린 버거 조인트, 3만 원짜리 고든 램지 버거가 있는데, 왜 막걸리는 늘 아직도 2천 원이 넘으면 욕을 먹어야 하나, 하는 절망감이 들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일엽편주나 지란지교, 해월처럼 오랜 시간 그 가치를 지켜온 곳들, 맛을 지켜나가는 곳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또 그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걸 보면서 우리 술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도 점차 바뀌어나갈거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오늘도 주변에 권하며 이 즐거움을 널리 알려본다.
[지란지교]
지란지교는 순창에 있는 소규모 양조장으로, 여름엔 무화과를 재배하고 겨울에는 술을 담근다. 전통을 복원하고 좋은 술을 담으시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분이 운영하시는 곳으로, 방문했던 지인의 말에 의하면 연구노트에 날씨부터 상세한 디테일들을 모두 정리하시며 맛을 관리하신다고 한다. 그런 정성이 맛으로도 이어져 지란지교의 탁주는 탁월한 맛을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