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이 주는 위안
남편과 나는 주방과 식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남편은 요리를 하고, 나는 커피를 내리거나 재료 손질을 거든다. 함께 식탁에 앉아 남편의 요리와 뭔가 마실 것 한 잔을 곁들이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가버리곤 한다. 쉬는 날, 우리의 일상은 부엌에서 시작해 식탁에서 끝난다.
남편은 요리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요리 유튜브를 챙겨보고, 집 앞 정육점 문자를 챙겨 받으며 요리한다. 반면에 난 요리에는 큰 소질이 없다. 결혼 전, 혼자 살 땐 집에서 먹고 싶은 간단한 메뉴 정도는 유튜브나 블로그를 보고 만들어 먹을 수 있었는데, 요리 잘하는 남편과 살다 보니 직접 할 일이 점차 없어져 이제 나에겐 (냉장고 안 아무거나 넣고) 볶기 기능만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많은 시간을 주방에서 보낸다, 요리는 못하지만 가끔 케이크도 굽고, 술도 빚고, 커피도 내리며.
이전부터도 손으로 뭘 만드는 걸 즐기긴 했지만, 폭발적으로 뭔가를 만들고 싶어 하던 시기는 아무래도 학위 기간이었다. 새벽까지 실험을 하고도 그 결과가 좋지 못하면, 침대에 누울 때까지 그 실패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실험이 망한 날엔 집에 오면 새벽 1 시건 3 시건 상관없이 쿠키나 케이크를 구웠다. 레시피만 잘 따라가면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베이킹은 나에게 실패한 실험에 대한 보상감을 채워 주었다. 요리나 베이킹도 결국, 재료를 특정 방식과 조건에 맞춰 가공해 결과물을 내는 실험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인지, 그 달콤한 성취감이 내 무너져가는 멘탈을 지켜주었다.
전통주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는 집에서 술을 빚기 시작했다. 원래도 술을 좋아했지만, 내가 마시는 술의 맛과 향을 직접 제어해 볼 수 있으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와인을 양조할 수는 없고, 쌀로 빚어 숙성하는 탁주나 약주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검색한 그날 바로 수업에 등록했다. 매주 일요일, 실험과 실험 사이에 시간을 내어 해방촌으로 다니며 술 빚는 법을 배웠다.
해보니 내 손으로 내가 마실 술을 직접 담는 일만큼 보람찬 일이 없었다. 가장 기본적인 재료로부터 시작해 끝에 그 결과물을 즐기는, 한 순환 고리를 모두 경험하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누룩을 햇볕에 널어 말리고, 쌀을 백번 씻어 밥을 짓고, 밥과 누룩을 잘 버무려 따듯하게 데워주어 효묘를 깨우면, 그 이후의 일은 효모가 맡아준다. 그러면 난 그걸 잘 걸러내어 낮은 온도에 보관하며 내 입맛에 딱 맞춰진 술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주방에 가면 재료를 손질하는 남편과 달리, 나는 주방에 가면 쌀을 씻고 불린다. 식사를 위한 밥이 아닌 술을 담그기 위한 밥이다. 그날 담을 술에 따라 쌀은 멥쌀이 될 수도, 찹쌀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담은 술을 남편과, 친구들과 식탁에 앉아 나눌 때면 행복이 뭔지 조금은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