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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elle Apr 23. 2024

일기

흰 종이 위 까만 글씨, 나와의 대화

초등학교 땐 그림일기 숙제가 그렇게 싫었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에 대해 새로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야 하니 머리에 쥐가 났다. 어제도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고, 오늘도 놀이터에서 놀았으니 두 날의 골자는 동일한데, 일기를 써야하니 특기할 만한 차이점을 어떻게 만들어내야만 할 것 같았다. (되돌아보면 어릴 때부터 피곤하게도 살았다 싶다, 그냥 똑같이 썼어도 별소리 안 들었을 것 같은데) 뭘 써야 하나 고민하다 보니 못 쓴 일기는 계속 쌓였고,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이면 차일피일 미루던 일기를 밀린 소설 쓰듯 졸속으로 해치워나갔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상황이 달라졌다. 아무도 나에게 일기를 쓰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매일 새롭게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나니 일기는 나에게 어느 순간 숙제가 아닌, 좋은 배출구가 되었다. 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는, 지금 되돌아보면 퍽 귀여운, 하지만 그때는 너무 진지했던 고민들을 종이에 열심히 써 내려갔다. 친구랑 싸운 이야기, 남자친구에 대한 고민, 부모님과 학교에 대한 불만… 썩 긍정적인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종이에 빠른 속도로 휘갈겨 쓰고 나면 속이 좀 후련해지고 다시 사회적인(?) 동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금 10대 때의 일기를 보면 이걸 불태워야 부정이 안 타려나 싶을 정도로 마음속 응어리들의 결정체다. 기록 그 자체가 아까워서 아직 태우지는 않았지만 죽기 전엔 꼭 태우고 죽을 예정이다.


20대에 들어서고는 일기를 쓰는 빈도가 많이 줄었다. 일기가 하던 역할을 술이 대신하기 시작했고, 밖에 나가 노느라 진득이 일기를 쓸 겨를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문득, 내 흉곽 안쪽 어딘가 텅 비어 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정말 물리적인 공허함을 느꼈다.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연애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항상 마음 한편이 비어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깊은 허무. 그때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단순히 종이로 된 배출구가 아닌, 허무감을 설명할 수 있는, 나아가 탈출할 수 있는 길로 활용하기 위해.


처음엔 나름 온라인에 일기를 썼다. 이 당시 아이패드가 출시되어 유행하기 시작했고, 나는 폴라리스 오피스, 구글 드라이브 같은 클라우드에 글을 썼다. 다만 아무래도 감정을 표현하는데에 있어 익숙한 포맷이 아니어서인지, 알게 모르게 자가감열 같은 것이 심해져 일기를 쓰는데도 나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남이 봐야 할 나에 대해 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타이핑의 효과인지, 마치 나에 대해 표현하라는 과제를 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바로 교보문고에 가서 적당한 노트를 샀다. 까만색 볼펜으로 못난 글씨체는 애써 무시하며 솔직하게 휘갈겨 쓴 일기는 오롯이 나만을 위한 글이었다. 어디에 공유되지 않을, 나만의 이야기들. 그렇게 드문드문 생각이 날 때면, 혹은 공허함이나 특별한 감정들이 느껴지는 날엔 일기를 썼다. 볼펜이 부드럽게 종이 위에 직선과 곡선을 번갈아가며 그어 나 스스로 이해되지 않던 내 감정들을 정리해 갔다. 좋은 날은 왜 좋았는지, 힘든 날은 왜 힘들었는지. 손은 타자보다 적당히 느린 속도로 문장과 문장 간 고민할 시간을 주었고, 그 시간 동안 나는 내면을 조금 더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일기 쓰기를 거창하게 말할 생각은 없다. 혹자는 글솜씨를 늘리려면 매일 일기를 쓰라고 하지만, 그건 문장 구조나 어순, 단어를 다양하게 활용해 보며 쓰는 글 연습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일기란, 손으로 천천히 템포를 조절해 가며 그날그날의 경험과 솔직한 감상을 복기해 보는 것, 그래서 나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기록보다는 매개체와 같은 역할이다. 매일 쓸 필요는 없지만, 쓰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땐 한 번쯤 혼자 조용한 곳에 앉아 나와의 대화를 해보는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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