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가 주는 맛
출근하면 곧장 탕비실로 가 반자동머신으로 커피를 내린다. 단순히 현대인의 필수영양소라고 불리는 카페인을 채우기 위함이다. 커피 없이는 그날의 생존이 불가능한데, 통근버스에서 텀블러를 몇 번 잃어버린 이후로는 집에서 커피를 내려오기가 부담스러워져 맛은 포기하고 영양소(?)만 챙기고 있다.
머신 위에 코스트코 스타벅스 원두가 잔뜩 들어있는 걸 확인하고 난 뒤 머신에서 더블 에스프레소 버튼을 누르면 웨에에엥-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커피가 만들어진다. 거기에 얼음과 물만 적당히 첨가해 하루를 시작한다.
점심 먹고도 마찬가지. 회사 식당 내 카페에서 별 특징 없는 커피를 사 먹거나 다시 코스트코 원두를 잔뜩 품은 반자동 머신 앞에 선다. 슬프게도 이번엔 얼음이 없다.
주말엔 이야기가 다르다. 아침 느즈막히 일어나 적당한 세팅으로 맛있는 원두를 갈아 바스켓에 로딩해 두고, 뜨거운 물을 흘려주며 에스프레소 머신을 예열한다. 예열이 끝나면 바스켓을 딱 맞게 끼우고 향 좋은 커피를 내려 마신다. 나를 깨우는 향긋한 하루의 시작 루틴이다.
오후에 정신이 들고 조금 여유가 있는 날엔, 그날의 기분에 따라 모카포트나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린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엔 원두를 조금 더 큰 입자로 갈아내어 핸드드립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원색적인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때엔 모카포트로 커피를 내린다. 아니, 모카포트의 경우라면 커피를 올린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다. 모카포트는 하단에 위치한 보일러에서 물이 끓으면, 끓은 물이 보일러 위에 놓인 바스켓 내 분쇄된 원두를 통과하면서 커피를 추출한다.
이 단순한 구조의 주전자가 별다른 추가 장치 없이 나름 꽤 훌륭한 크레마가 곁들여진 커피를 만들어준다. 이탈리아에서는 모카포트를 잘 길들여 대를 물려주기도 한다는데, 단순하면서도 멋스럽기 그지없다.
집에서도 좋은 원두를 넣으면 반자동머신으로 꽤 훌륭한 맛의 커피를 편하게 마실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수동머신과 드리퍼, 모카포트를 고집하는 이유는 나에게 좀 더 제어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멋도 있다) 커피는 물의 온도와 물-커피와의 접촉시간, 분쇄도와 같이 다양한 요소에 의해 추출되는 맛과 향이 달라지므로 이 조건, 저 조건을 시도해 보며 나에게 최적화된 맛을 찾는 재미가 있다.
시간과 노력을 들일 수 있는 그 여유가 커피 맛을 더 향상시키는 효과도 있는 것 같다. 향 좋은 커피를 시간을 들여 내릴 때 여유를 더 느낀다. 내가 마시는 음료에 더 성의를 쏟아낼 수 있는 그 여유가, 부드러운 혹은 조금 더 개성 있는 날 것의 커피 맛에 행복을 더한다.
모카포트는 캠핑에서도 그 빛을 발하는데, 스토브 위에 원두와 물을 채운 모카포트만 얹어 열을 가하면 뚝딱하고 진한 커피가 추출된다. 핸드드립도 마찬가지다. 분쇄된 커피 위로 물을 일정하게 부어줄 수 있는 주전자만 있다면 값비싼 장비 없이 훌륭한 커피가 완성된다.
향과 여유를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먼저 모카포트를 권한다. 2인용 기준 3-4만 원이면 모카포트의 역사를 품은 이탈리아 비알레띠 사의 모카포트를 구매할 수 있다. 많은 관리가 필요 없고 에스프레소 머신등에 비해 합리적인 가격으로 홈카페 라이프를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