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5.07.20. 자기효용감

by Noelle

요즘 부쩍 무료해졌다. 전과 같이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바쁘게 지내는데도 새삼스레 사는 게 재미가 없다. 최근 건강 문제로 술을 줄여 뜻하지 않게 제일 큰 도파민을 디톡스 중이라 도파민에 둔감해진 건 아닌 것 같다. 묘한 무력감이 들 때면 수영을 가거나 뛰었다. 땀을 내고 숨 가쁘게 움직이다 보면 잡생각이 줄어들어 잠시간 괜찮은데, 다시 가만히 앉아있으면 묘하게 가라앉았다. 한참을 바쁘다가 최근에서야 다시 여유를 얻었는데, 나는 왜 예전만큼 즐겁지가 않을까.


나는 시간이 허용하는 한 다양한 일을 한다. 책을 읽고, 술을 빚고, 운동하고, 와인을 마시거나 겨울에는 뜨개실로 양말도 뜬다. 바쁠 땐 잠을 줄이고 시간을 쪼개서라도 내가 행복할 만한 일을 했다. 대학원 시절에는 새벽까지 실험을 하다 집에 와서 케이크를 구웠다. 시간을 쪼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어렵사리 끼워 넣는 것까지 즐거움의 일부였는지, 요즘 노는 시간이 늘어나니 오히려 조금 덜 재밌나 싶었다. 그래서 일상에 루틴들을 더 빼곡히 채워 넣어 가용 가능한 시간을 줄였다. 그러면 다시 박진감(?)이 생겨야 되는데, 아직 예전만치 막 행복하지가 않다. 도대체 원인이 뭘까 고민하던 찰나, 우연히 시디즈 광고에서 주변에 월급루팡 싶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잘하고 싶다고 말하는 카피를 보고, 아 이거구나 싶었다.


근 몇 달간은 출장과 회의의 연속이었다. 일주일 동안 북미 4개 주를 이동하거나 한국에서 샌프란시스코를 1박 4일로 다녀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출장을 다녔고, 실험하는 중에 갑자기 불려 나가 회의에 참석하거나 정장을 입을 일도 생겼다. (엔지니어에게는 굉장히 드문 일이다) 생리 주기는 틀어지고, 누가 봐도 얼굴에 핏기가 없었으며, 모두가 내 건강을 염려했다. 그래도 그때 나는 대단한 역할은 아닐지언정 해당 업무에서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고, 그 느낌으로 그 시간을 버텨냈다. 퇴근하면 피곤하지만 운동을 가고 맛있는 와인을 마시며 행복해했다.


쓰나미 같던 시간이 지나가고 다시 연구개발 업무로 돌아왔을 무렵부터 무력감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주 5일 업무시간 동안 메일을 읽고 실험을 하는 그 루프 안에서 내 쓸모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현재 수행하는 업무에서 내 능력은 내 스스로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나는 전보다 바쁘지 않은데도 훨씬 더 피곤한 상태로 퇴근했다. 업무에서 만족도가 크게 떨어지는 느낌이 퇴근 후까지 연결되어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잘 다루지 못하는 CAD와 씨름하며 머리를 싸매고 능력치의 한계를 조금 이겨냈다 싶었던 날은 퇴근하고 하루를 즐겁게 보냈던 것 같다. 결국 내가 일에서 느끼는 내 쓸모, 내 효용감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내 삶에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좋든 싫든 회사에서 돈 벌고 그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그만이다 생각해 왔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니 거기서 오는 보람이 큰 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내 일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keywor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