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앞의 사소한 선택들
우리는 늘 선택지에 놓이게 된다. 이번 휴가는 어디로 갈지, 이사는 어디로 갈지, 넷플릭스에서 뭘 볼지, 이직을 할지, 한다면 어디로 갈지… 몇 가지 경우의 수 사이에서 소심하게, 때로는 과감하게 결정한다. 빈도수로만 따졌을 때 내가 가장 자주 하는 선택은 “점심 뭐 먹지”인 것 같다. 참 속 편하게 산다 싶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인생에는 훨씬 더 중요한 결정들이 산재해 있다. 출산이라던지, 금을 살 것인지 미국 주식을 살 것인지 같은 선택들. 하지만 어떻게 항상 그런 무거운 생각들만 하고 살겠나, 과부하 걸리게.
나는 주중에는 전날 밤부터 사내 식당의 아침 메뉴,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면 저녁 메뉴까지 고려해서 점심 메뉴를 결정한다. 회사 밥이 맛있어봐야 뭐 얼마나 맛있겠냐만은, 하루에 3번밖에 없는 끼니 중 하나이니, 몇 개 없는 옵션 안에서라도 신중하게 선택한다. 가만 생각해 보니 너무 먹는 것에만 치중해 살고 있지는 않은지, 이런 데 머리 낭비 말고 주식을 제대로 공부했으면 진작에 주담대를 털었겠다 싶기는 하긴 한데… 아무튼 나는 그렇다.
뭐 점심 메뉴 한 번 실패한다고 인생이 망하지는 않는다, 길어야 오후 반나절 정도나 좀 기분 나쁘면 그만일 일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5분 정도를 “오늘의 메뉴”를 띄워두고 재고 따지는 데 쓴다. 잠시간의 고민으로 밸런스 좋게 하루 식사를 마치고 나면 기분이 좋으니까.
선택의 결과가 무겁든 가볍든 그저 밥 메뉴에 불과하든, 우리는 매 순간 가치 판단을 하고 있다. 근거에 기반해서 (저녁에 약속으로 고기를 먹을 예정이다) 논리 과정을 거쳐 (술도 마실테니 점심은 좀 건강해야겠지) 어떤 결론을 내린다. (그래도 샐러드는 먹기 싫은데? 그냥 A메뉴를 먹자 - 잠시만, 이게 아닌데?) 보통 우리가 근거-판단 논리-결과로 단계를 나누어 생각하지는 않지만, 알고 보면 매일 의사결정 과정을 몸소 행하고 있다. 새삼스레 이 일련의 과정을 되돌아보게 된 건 지난주 수강했던 ‘필수 통계’ 강의 때문이다.
간만에 푸는 적분과 편미분 식에 잠시간 뇌가 놀라긴 했지만, 통계 수식들 안에 숨겨진 논리를 배우는 게 꽤나 흥미로웠다. 솔직히 말해 요즘 세상에서 와이블 분포나 F분포 같은 상세 분석 방법들을 아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ChatGPT에 데이터를 주고 원하는 통계량을 말하면, 알아서 계산해 주고 심지어 그 과정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세상이니까.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결국 통계 분석은 1) 원하는 통계량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2) 그 질문에 부합하는 데이터를 얻어 3) 올바른 방식으로 그 데이터를 분석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질문을 못한다면, 나아가 적합한 데이터를 얻지 못한다면 ChatGPT가 아니라 ChatGPT 차차세대 버전이 나와도 적절한 답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잘 질문하고 있는가?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정확하게 질문하고, 그에 맞는 근거로 올바르게 판단하고 있는가를 되돌아보면, 그렇지 않을 때도 많은 것 같다. 우리는 종종 감정적으로 판단하고, 편향된 데이터를 필터 없이 받아들이기도 한다. 유의미한 데이터를 검증 없이 무시해버리기도 하고, 우연이나 아웃라이어로 손쉽게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결정하는 건 너무 자연스럽고 편리해서, 고착되기 되기 쉽다. 정확한 질문과 적절한 근거, 그리고 그에 기반한 판단은 부단한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다.
점심메뉴를 고르는 게 별일 아닌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우리는 점심 메뉴를 고르고 실패하면서 어떤 결정이 이후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확인하고, 그다음엔 더 적합한 결론을 내기 위해 질문을 바꾼다. 저녁 메뉴를 고려하지 않고 선택한 점심 메뉴로 후회했다면, 그다음 결정엔 저녁 메뉴라는 인자를 추가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매 순간 무거운 고민만 하면 얼마나 고달픈가. 그러니 이런 점심메뉴나 고민하며 가치판단의 사고 흐름을 연습하는 것이다.
뭐 별 것도 아닌 점심 메뉴 고르는 일을 너무 확대해석했나 싶긴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기왕 일요일의 잠깐을 희생해 월요일을 조금이나마 덜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 아닌가. 나아가 통계적 사고를 기르는 연습까지 된다면 얼마나 더 좋은가, 생각하기로 했다. 사설이 길었다. 어휴 출근하기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