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드로낙 GLENDRONACH
술은 취향의 영역이다. 위스키처럼 향과 맛이 강하면 더더욱 호불호는 갈릴 수 밖에 없다. 내가 싫어하는 진한 꿀 향의 위스키가 누구한테는 최애가 될 수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피트 향 강한 위스키를 누군가는 코만 갖다대었다가 잔을 스윽- 밀어내 버릴 수도 있다.
일례로 나는 크리스마스에 아벨라워ABERLOUR를 선물 받은 적이 있는데, 아벨라워는 자체 팬층이 꽤 두터운 위스키임에도 불구하고 그 특유의 찐득한 질감의 꿀 맛이 나를 상당히 지치게 했다. 이대로 찬장 속에서 먼지만 쌓이나 싶었는데, 집에 오는 손님들 중에 또 그 특징적인 단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 대접용으로 큰 활약을 떨쳤다. 시장에 다양한 몰트, 다양한 캐스크 숙성 위스키가 나와있는 것은 아마 수많은 각기 다른 취향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거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몇몇 사람들은 (혹은 대부분은) “위스키가 위스키맛이지뭐, 서로 다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연히 그럴법한 것이, 위스키에 높은 도수에 압도되어 처음에는 향이 잘 느껴지지 않을 수 있고, 한자리에서 다른 위스키들을 비교하면서 마시지 않는 한 각 위스키의 특징을 기억하기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 날 A 위스키를 마시고 한참 뒤 B 위스키를 마셨을 때 그 차이를 분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 취향을 찾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노력과 품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술을 다양하게 탐험하고 즐기기 시작하면서 본인 스스로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기도 한다. 나는 애당초 단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꿀 계열의 향을 갖는 위스키는 당연히 다 싫을 줄 알았다. 그런데 재밌게도, 아벨라워는 싫었는데 아란(ARRAN) 소테른 케스크는 꿀 계열인데도 종종 찾아 마신다. 아란 소테른 캐스크 특유의 라이트 한 꿀 맛과 싱그러운 배 향이 기분좋은 디저트 와인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인가보다. 테이스팅 노트에 꿀이 써져있어 바로 피해버렸다면 영원히 알 수 없었을 즐거움이다. 내가 의외로 꿀 향을 좋아하네? 하고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변에 ‘~ 계통의 맛은 싫다’라고 단정 짓지 말고 다양하게 맛보라고 계속 권한다. 맛과 향이란 상당히 섬세해서, 싫은 것 와중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초콜릿은 안 먹는데 초콜릿 칩이 박힌 쿠키는 없어 못 먹는, 그런 내 이상한 취향과 같달까, 술은 그런 재미가 있다.
그렇게 내가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계통 중에 하나가 바로 셰리 캐스크 피니쉬 위스키들이다. (와인 중에는 무거운 바디의 블랙과실 계열의 와인들을 좋아해보려 계속 도전하고 있다) 쉐리란 스페인의 주정강화 와인의 일종으로, 주로 화이트 와인에 주정강화용 알코올을 섞어 발효해 도수를 올려놓은 술이다. 쉐리 캐스크 숙성이나 피니쉬의 경우 프리미엄의 이미지를 많이 갖게 되는데, 이는 쉐리를 숙성할 때 쓰는 솔레라 공법 특징 상 캐스크 자체가 많이 유통되지도 않고 귀하기 때문이다. 주로 포도 계열의 향이 나며, 위스키 숙성용 캐스크로는 드라이 쉐리 중에서는 올로로소가, 당도 높은 쉐리 중에선 페드로 히메네즈가 주로 쓰인다.
나는 포도로 만드는 와인은 좋아하지만, 포도향이 나는 쉐리 캐스크 위스키는 별로 즐기지 않는다. 위스키에서 강한 포도향이 느껴지는 게 이질감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쉐리 캐스크의 대표주자들-맥켈란MACALLAN이나 네이키드 그라우스NAKED GROUSE 같은 위스키-를 크게 선호하지 않는데, 신기하게도 가끔 손이 가는 쉐리 캐스크 위스키가 있다. 바로 글렌드로낙GLENDRONACH. 심지어 글렌드로낙 12년은 단순히 피니쉬만 입히는 게 아니라 아예 12년동안 올로로소와 페드로 히메네즈 캐스크에서 숙성해서 그 특성이 강해 쉐리 숙성 위스키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 쉐리 향이 싫다면서 왜 가끔 글렌드로낙을 찾게되는걸까.
맥켈란과 글렌드로낙은 동일하게 셰리 캐스크 피니쉬이지만, 향의 결이 조금 다르다. 글렌드로낙은 포도 밑에 약한 사과향과 가벼운 캐러멜의 향이 올라오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캐러멜향이 차츰 짙어져 가끔 그 단 향이 좀 강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혀에서는 오히려 좀 더 가볍고 보리 맛이 조금 느껴진다. 맥켈란(더블 캐스크)은 같이 쓴 버번 캐스크의 영향인지 포도와 함께 약간 가벼운 꿀 향과 바닐라, 그리고 나무향이 조금 느껴진다.
글렌드로낙의 담백하고 가벼운 질감, 묘한 사과향에 이끌려 종종 한 번씩 꺼내 마시게 된다. 참고로 난 모든 과일을 다 좋아하는데 사과는 잘 안 먹는다. 쉐리 캐스크는 싫은데 또 그 중에서는 글렌드로낙은 좋고, 사과는 먹지 않는데 또 글렌드로낙처럼 사과향 나는 위스키는 맛있고. 이 얼마나 “콩은 싫은데 콩자반은 좋아” 같은 상황인지, 말하면서도 피식 웃게 된다. 결국 사람 입맛은 다분히 복합적이어서, 역시 아무래도 단순히 쉐리 숙성 싫어! 외칠 수 없음이다. 내 안에도 취향이라는 게 복잡하게, 겹겹이 있는 것을.
GLENDRONACH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동쪽에 있는 디스틸러리로, 스코틀랜드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주류 제조 면허를 가지고 있는 디스틸러리이다. 지어지고 얼마 안 되어 큰 화재를 겪고 최근까지도 계속 여기저기 팔려 다니며 다사다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가열방식을 석탄에서 스팀으로 변경한 디스틸러리로, 고유 방식을 유지하려 노력을 많이 했다. 주로 올로로소 쉐리 캐스크로 숙성을 많이 하는 곳이었지만 최근 몇 년 간 버번 캐스크에서 숙성도 시작했다고 한다. (추후 시장에 나오는 글렌드로낙은 좀 더 맥캘란과 비슷해질 것 같은 약간 불행한 예감이 든다.) 가격이 꾸준히 오르고 있지만 진짜 쉐리 캐스크를 경험하고 싶다면 아직 가성비도 훌륭한 싱글몰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