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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노엘 Nov 02. 2017

크리스마스 퍼레이드 1  


 호놀룰루에서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동네별로 크리스마스 퍼레이드를 한다. 운 좋게도, 우리 동네인 kaimuki의 퍼레이드 시작점은 바로 우리 집 앞 잔디밭이었다. 역시, 집을 잘 구했어. 크리스마스 퍼레이드를 손쉽게 집 앞에서 볼 수 있다니. 



 오후가 되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웃음소리,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악기 연습 소리들이 한데 엉켰다. 조용하기만 했던 창밖 공기가 들썩였다. 시끌벅적한 소리를 들으니 괜히 나도 설렜다. 게다가 반팔 차림의 크리스마스라니! 난생처음이었다. 기대된다.


 

 모두들 즐거운 표정이다. 반팔 차림에 산타 모자를 쓰고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는 사람들. 퍼레이드를 할 때 연주할 곡을 진지한 표정으로 연습하는 학생들. 옷을 맞춰 입고 대열을 맞춰 보고 자기 학교 깃발을 당당하게 펼쳐 본다. 사람들은 팻말을 써오고 군것질을 준비하고 다양한 액세서리들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냈다. 



 별 것 아닌 동네잔치일 뿐인데. 나야 하와이에서 크리스마스를 처음 맞아보니 신기하지 이 사람들에게는 매년 있는 퍼레이드 아닌가. 우리로 치면, 뭐 젓갈 축제. 아니 젓갈 축제도 너무 크다. 은평구 노래자랑이나, 마포구 마을 대잔치, 뭐 이 정도쯤 아닐까.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어쩌면 시끄럽기만 할 수도 있는 동네잔치. 



 신나면서도 조금 낯설었다. 이들이 이렇게 열심을 다해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것이. 퍼레이드 몇 시간 전부터 잔디밭에 나와 깔깔대며 웃고 있는 모습이. 실적, 실력, 성과, 수익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에 마냥 최선을 다할 수 있음이 어색했다. 음. 한국에서, 만약 북가좌동에서 크리스마스 퍼레이드를 한다면 사람들은 이 날을 기대하면서 한 달 전부터 악기를 연주하고 옷을 준비할까. 몇 시간 전부터 광장에 나와 퍼레이드를 기다릴까. 합정동에서 퍼레이드를 한다면, 소방차가 와서 만일의 사고를 대비하고 경찰들이 원활한 퍼레이드를 위해 도로를 막아줄까. 사람들이 항의를 할지도 모른다. 왜 퇴근길에 쓸데없이 도로를 막냐고. 



 그러나 우리는 안다. 아무것도 아닌, 시끄럽기만 한 이 동네잔치가 결국에는 가장 소중하게 남을 순간임을. 별 것 아닌 일인데도 꽤나 분주했던 호들갑. 특별한 이유 없이도 자꾸만 들뜨던 마음과 지치지도 않고 폴짝폴짝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귀여운 발자국. 중요한 회의도 아니고 돈이 남는 일도 아닌, 내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그냥 노는 시간. 두고두고 기억에 남겨 혼자 꺼내보고 웃을 수 있는 장면들은 바로 이런 시간들이다. 



 나만의 장면들도 생각난다. 


 "엄마,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빨리 자면 내일이 빨리 와."


 소풍 전날이면 언제나 엄마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한시라도 빨리 소풍을 가고 싶어서. 이런 내 마음과는 전혀 달리 엄마는 한시라도 빨리 나를 재우고 싶었겠지. 전혀 다른 두 마음을 가졌던 우리 두 사람의 대화에 이제는 웃음이 나지만, 어쨌든 내가 빨리 자서 모두가 행복했던 소풍 전날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가까운 공원, 뒷동산으로 가는 소풍이었는데 뭐가 그리 설렜을까.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장면들은 늘 이렇게 시시한 것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집 밖으로 나왔다. 또 하나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산타 모자나 루돌프 뿔 머리띠 같은 건 없었지만. 이런 걸 준비해야 하는 줄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뭐라도 만들었을 텐데. 그래도 나름, 빨간색 티를 챙겨 입었다. 크리스마스니까! 아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이 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한껏 들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열심히 사진도 찍었다. 최선을 다해 나도 나만의 크리스마스 퍼레이드를 즐겼다. 


 그러다 저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자기 몸집만 한 북을 들고 나를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 소녀는 알고 있을까. 지금의 열심과 떨림이 얼마나 풋풋한지. 이 반짝이는 표정이 두고두고 자신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될지. 이 한 장의 사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기운은 결코 식지 않을 거란 사실을. 그리고 나도 그녀의 사진을 보며 오래도록 미소 지을 것임을. 그녀는 아마 모르겠지. 




 한 장의 사진으로 또 하나의 추억이 쌓인다. 너와 내가 함께 했던 시간이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도 함께 웃는다. 



 모두 마음껏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우리의 산타 할아버지는 더운 날씨 때문에 너무 힘들었지만. 산타 할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며, 너무 더워서 더 이상 모자를 쓸 수 없다고 사과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시뻘건 얼굴에 땀으로 범벅이 된 산타 할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모두가 열심을 다해 즐기는 크리스마스. 


 우리도 메리 크리스마스! 아기 예수님의 축복이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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